겐나디 게라시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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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나디 게라시모프
Геннадий Герасимо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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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라시모프(2001년) | |
주포르투갈 소련 대사 | |
임기 | 1990년~1991년 12월 25일 |
전임 | 발렌틴 카삿킨 |
후임 | - |
대통령 |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
주포르투갈 러시아 대사 | |
임기 | 1991년 12월 25일~1993년 3월 16일 |
전임 | - |
후임 | 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 |
이름 | |
본명 |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Герасимов |
로마자 표기 | Gennadi Ivanovich Gerasimov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30년 3월 3일 |
출생지 | 소련 러시아 SFSR 옐라부가 |
사망일 | 2010년 9월 14일 | (80세)
사망지 | 러시아 모스크바 |
국적 | 소련 러시아 |
학력 | 국립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교 |
겐나디 이바노비치 게라시모프(러시아어: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Гера́симов, 1930년 3월 3일~2010년 9월 14일[1])는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이다.
생애
[편집]소련의 마지막 포르투갈 대사였으며,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초대 주포르투갈 러시아 대사를 지냈다. 이전에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외교 담당 대변인이었고, 소련 외무상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의 공보 비서였다.[2]
그는 고르바초프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에 대한 불개입 정책과 관련하여 시나트라 독트린이라는 표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1987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프라하의 봄과 페레스트로이카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게라시모프는 "21년이라고 대답했다.[3][4]
그는 1990년 전미 정부 통신사 협회(NAGC)로부터 올해의 통신사로 인정받았다.[5]
한국과 소련의 수교 작업에 있어서 세바르드나제 외무부 장관과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6][7] 외무부 대변인 시절 소련은 북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8] 게라시모프는 북한을 방문하여 휴전선 인근을 방문한 적이 있다.[9]
각주
[편집]- ↑ Diário Digital / Lusa (2010년 9월 16일). “Rússia: Morreu o último embaixador soviético em Portugal”. Diário Digital. 2011년 9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9월 17일에 확인함.
- ↑ “Russia's Media Revolution: From Party Control to Money Control” (PDF). East-West Center. 8쪽. 2017년 8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9월 7일에 확인함.
- ↑ Jacques Levesque, The Enigma of 1989: The USSR and the Liberation of Eastern Europe (Berkeley-Lond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p. 62.
- ↑ “[캐나다 한국일보] ‘진보’의 분열”. 202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 “Former Russian Official To Speak At Muhlenberg”. Morning Call. 2012년 3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9월 7일에 확인함.
- ↑ 구범회 (1990년 2월 22일). “韓.蘇국교정상화 연내 가능한가”. 202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 “韓·蘇 ‘밀착시대’ 다가온다”. 1990년 3월 18일. 202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 “소,북한에 대해 영향력 행사못해/게라시모프”. 1990년 2월 24일. 202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 “"휴전선장벽 직접 봤다"...게라시모프, 북한제의 지지”. 1990년 2월 20일. 2024년 4월 2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