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이용휘 (196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EARMISS (토론 | 기여)
25번째 줄: 25번째 줄:
=== 영남신당 추진 ===
=== 영남신당 추진 ===
이용휘는 현재 영남신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새로 창당하는것을 추진하고 있으며 창당준비위원회가 활동중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3&aid=0002082484]
이용휘는 현재 영남신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새로 창당하는것을 추진하고 있으며 창당준비위원회가 활동중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3&aid=0002082484]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125.010040745200001]
[http://dk.breaknews.com/sub_read.html?uid=37743&section=sc1&section2=정 치]


== 바깥고리 ==
== 바깥고리 ==

2012년 1월 25일 (수) 14:28 판

이용휘(李龍徽, 1962년 2월 20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생애

출생 및 성장기

이용휘(李龍徽)는 1962년 2월20일 강원도 울진군(현.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1리 1145번지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용휘는 그가 태어난 고향에서 매화국민학교와 매화중학교를 마쳤다. 그는 인문계고등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1976년 2월 대구 유학길에 올랐다. 이용휘는 고교 3년 동안 전교 차석을 놓치지 않는 등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회입문 및 사회.정치활동

이용휘는 1979년 1월 6일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한일은행(우리은행 전신)에 입행하여 1984년 4월까지 약 5년간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이용휘는 1984년 4월경 은행원생활을 접고 사법시험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새마을고시촌으로부터 시작해 동화사의 말사 중 하나인 양진암에 이르기까지 5년여에 걸쳐 사법시험,행정고시,CPA 등을 준비하던 중 운동권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이른바 고시낭인의 생활을 청산하기에 이른다.

개혁당살리기와 개혁당집행부업무정지가처분신청의 소송

1998년9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서울로 상경한 이용휘는, '100년 가는 정당'을 기치로 내걸고 창당한 개혁당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유시민을 비롯한 개혁당집행부가 창당한 지 채 1년도 안된 당을 불법적으로 열린우리당에 합당시키려고하자, 함께하자는 그들의 회유를 뿌리치고 '개혁당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 5인공동위원장을 맡아 김원웅.유시민.이광철.김태년 등 개혁당 집행부 전체를 상대로 [개혁당집행부업무정지가처분신청 및 대표자대행선임가차분신청의 소]를 제기했다. 이용휘는 1년여 동안 개혁당살리기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개혁당살리기는 성공한다. 그러나 유시민파의 방해공작과 개혁당살리기에 동참한 이들의 내부분열로 인해 개혁당은 결국 역사의 뒷켠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울뉴스 창간과 한미준 창당

이용휘는 2005년5월 인터넷신문 '서울뉴스'를 창간해 초대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하며 각종 인터넷 언론에서 칼럼니스트 및 논객으로 활동했다. 또한 2006년4월19일 '화합형'.'경륜형'.'청백리형'의 소위 '제3세대리더십'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를 옹립해, 골깊은 동서단절의 강을 메우고 진정한 국민통합의 역사위에 남북통일을 넘어 선진조국을 창조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한미준)을 창당하여 초대 당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창당 이전까지만 해도 과정을 함께했던 고건 전 국무총리 측의 갑작스런 고사로 인해 고건 전 총리 측과 갈라선 뒤, 같은 해 5월31일에 치르진 '제4회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대전시장,부안군수,무주군수,보성군수등 광역 및 기초단체장을 비롯, 서울시의원등 전국에 걸쳐 광역 및 기초의원 후보를 내면서 선거전에 뛰어들었으나, 기성정치권의 높은 장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7대선 박근혜캠프 합류와 18대 국회의원 출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된 2007년 5월. 이용휘는 고건 전총리를 통해 못다한 국민통합의 역사를 박근혜를 통해 다시금 이루고자, 박근혜 후보 캠프에 합류하여 박근혜 특별보좌역 및 박근혜캠프 사이버문화위원장을 맡아, '국민통합의 적임자는 박근혜 뿐이다'임을 설파하며 박근혜 후보의 지지도 상승에 일조했지만, 그의 희망은 또 다시 좌절됐다.2008년 4월 9일에 치르진 18대 총선. 이용휘는 한나라당의 잘못된 공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탈당,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중랑구 ]을)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지역정서에 바탕한 뿌리깊은 지역정당구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낙선하고 말았다.

'친박연합'의 탄생과 '6.2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이용휘는 2008년8월 자유선진당을 탈당하고 친박연대 서울시당 수석부위원장으로 컴백했지만, 서청원을 중심으로한 친박연대 지도부의 비민주적 당운영을 신랄히 비판하다가 벽에 부딪친 뒤, 2010년3월 6.2전국동시지방선거를 2개월여 앞두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인 박준홍과 손잡고 '한미준(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당)'->'선진한국당'으로 변모한 정당을 '친박연합'으로 당명을 개정해 '대표 당무위원=박준홍', '사무총장 겸 당무위원=이용휘' 구도의 투톱 체제로 선거에 임해 광역 및 기초의원 22명을 당선시켰다.

박준홍과의 갈등

이용휘 사무총장과 박준홍 대표간에 갈등이 있다. 박준홍대표측에서 이용휘사무총장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경질하였으나, 이용휘 사무총장 측은 이 회의가 불법적으로 진행된점 등에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 김형기 대변인이 박준홍 대표의 불법적인 행위를 비판하며 탈당하였다. 결국 박준홍 대표는 6.2지방선거 과정에서 대구광역시의원 주모씨로부터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하여 거액의 공천헌금을 받은 혐의로 2010년 9월 주모씨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2010년 11월 26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김현미 부장판사)는 박준홍에게 징역 2년 추징금 3천만원의 실형을 선고했다.

영남신당 추진

이용휘는 현재 영남신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새로 창당하는것을 추진하고 있으며 창당준비위원회가 활동중이다.. [1] [2]

바깥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