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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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년 2월 25일~1919년 12월 3일)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써,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 특수한 표현을 보였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에 대하여,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 것은 르누아르이다. 세잔이 풍경 속에 자연의 정신을 품듯이 르누아르는 여인을 그려서 미의 도취를 자아내고 있다.

생애

르누아르는 리모주에서 재봉사 집안에 태어났는데, 얼마 되지 않아 양친을 따라서 4살 때 파리에 나왔다. 그러나 가정은 가난하여, 12~3세 때부터 도기 공방에 첨화직공으로 들어가 일했다. 그 동안에도 데생을 배우고 미술관에 다녔는데, 도기에 그림을 붙이는 기계가 발명되자 직공 일을 그만두고 회화에 전념했다. 그 때에 그는 글레르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동문으로 모네, 시슬레, 피사로가 있어 굳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처음에는 살롱에도 출품했는데, <리즈>(1867)의 상(像)을 중심으로 그의 작풍은 분명하여지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에는 파리 교외에서 모네, 시슬레와 함께 제작을 했다. 이어 인상파 제1회 전시회(1874)에 유명한 관람석을 출품했는데 그 당시는 비난을 샀다. 그러나 1876년에는 대작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발표하여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광선과 춤추는 군중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르누아르는 조심스럽게 생활하였는데, 지우를 얻어 사교계의 사람을 그린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딸들〉(1878)과 그 밖의 것도 아름답다. 세잔은 자연을 추구했지만, 르누아르는 인간에게 그 흥미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1881년에는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한층 빛에 용해되어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변하지만,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써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리였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만년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 정주하여 오로지 제작만을 계속, 최후에는 영광을 누리며 홀로 들어앉아, 의자 위에서 화필을 쉬지 않고 아름다운 나부의 제작을 계속했다. 주요 작품으로 〈해수욕장의 풍경〉, 〈대수욕〉, 〈목욕하는 여인들〉, 〈큰길〉 등이 있다.

같이 보기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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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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