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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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智蔡文, 964년 ~ 1026년)은 고려 전기의 무신이다. 자(字)는 호간(浩幹), 봉산 지씨의 시조이다. 상장군 우복야(右僕射)에 오르고, 1등공신으로 추록되었다.

생애

입신

979년(경종 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

서경 방위전

1010년(현종1년) 중랑장에 임명되어 하공진유종과 함께 화주의 방비를 맡았다. 같은 해 하공진유종이 조공하러온 여진족 추장 일행95명을 몰살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진이 이를 억울하게 여겨 거란요나라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하였고 그에 따라 요 성종은 여진의 협력을 약속받고“고려의 강조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워 대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라며 침입해 왔다.

요군이 서경으로 임박하자 지채문과 탁사정을 시켜 서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지채문은 탁사정과 합류하여 서경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서경이 요나라에 항복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독으로 서경으로 진군하였으나 서경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최창이 상문 밖에서 분대어사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겨우 입성하였다. 서경에 입성한 지채문은 서경유수 원종석을 만나 항복을 철회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여 최창과 상의하여 독단으로 일을 돌이킬 수 없도록 요나라 사신단을 살해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항복문서를 없앴다. 그러나 여론은 변하지 않았다. 이때 고려의 국왕인 현종 마저 요 성종에게 표를 올려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지채문은 서경 밖으로 쫓겨났으며 서경 수비군 중에서는 대장군 정충절 만이 그를 따랐다.

현종의 항복 표문을 받은 요 성종은 거란인을 새로운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1천명의 호위를 붙여 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이 대군을 이끌고 서경에 도착하여 서경을 장악했다. 때마침 요 성종이 보낸 서경유수 올름이 서경에 도착하였는데 탁사정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요 성종이 임명한 서경부유수 한기를 갑자기 습격하여 이들을 괴멸시켰다. 요 성종은 노하여 선발대를 보내 서경을 공략하였으나 지채문이 이를 요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나 곧 요 성종의 본대가 도착하자 고려군을 패퇴하였고 서경은 포위되었다.

탁사정은 백전노장 대도수와 상의하여 대도수는 동문으로 출격하여 요군의 측면을 혼란시키면 탁사정은 서문으로 나아가 요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도수는 기꺼이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 전투에서 탁사정은 성문이 열리자 마자 도주해버렸고 대도수는 사로잡혔다.

사후

1031년(덕종 즉위년) 현종 때 남행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으로 추록되었다.

덕종이 즉위하자 이러한 조서를 내렸다.

고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 지채문은 선왕께서 남쪽으로 파천하셨을 때 홀로 충절을 온전히 지켜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제 그 공훈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노라.

지채문이 등장한 작품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