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15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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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李戩)
출생지 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지 조선
복무 조선
복무기간 1540년 - 1598년
최종계급 지중추부사
지휘 조선 국군
주요 참전 임진왜란

이전(李戩, 1517년 1월 21일 ~ ?)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으로 조선 중종, 명종, 선조 때의 장군이다. 본관(本貫)은 우계(羽溪)이다. 선전관, 부사 등을 거쳐 명종때에 승정원동부승지와 좌승지,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지냈고, 경기도수군절도사, 선조 때 평안도병마절도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포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수성대장의 중임을 맡았으며 임금에게 전략 12조를 헌책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몽양가는 선조왕의 가마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이지방의 손자이고 이광식의 아들이다. 이감의 친동생이었다. 이복남의 할아버지였다.

생애

1540년(중종 3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1546년(명종 1) 호조좌랑을 지냈다. 1553년(명종 8년) 사도사첨정(司導寺僉正)으로 있을 때 관비를 솔축했다 하여 탄핵받고 파직됐다가 복관했다.[1] 그 뒤 1555년 6월 장흥부사(長興府使), 명종 11년(1556년) 경흥부사(慶興府使)를 거쳐 1558년 만포첨사가 되었다.[2]

1561년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했다. 그해 겸 경연참찬관, 좌승지를 지냈다. 1561년 11월 다시 승진하여 가선대부로 공조참판이 되었으며, 1561년 함경북도 절도사로 나갔다. 이후 1562년 함경북도절제사·전라병마절제사 등을 거쳐 1563년 경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병중인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수유(受由)를 청했다가 승정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임금이 특별히 배려하여 처벌을 면하고 휴가를 받았다.[3]

이광식(李光軾)이 늙은 무관으로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며, 부자간의 심정이 절박하여 그런 것이니 추고할 수 없다. 이전의 본직을 체차해서 아비의 병환을 구료케 하여 효도로 다스리는 나의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3]

1566년 대호군(大護軍)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가 되어 동지를 하례하고 귀국했다. 동지사로 가던 길에 구련성 성보 수축 이후 폐단을 통역관을 시켜서 적어 보냈다.

지금 이미 성을 쌓았으니 우리 나라로서는 감히 왈가왈부할 바 아니나 이 성보는 적을 막는 데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한갓 양국의 흔단만 열 뿐이어서 해만 있고 이익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사견을 개진한다.[4]

선조 즉위년(156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제주목사(濟州牧使), 그 후 그는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에서 형장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순무 어사(巡撫御史)에게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관 그해 8월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다. 그해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 북병사, 회령부사 등을 역임하여 북문으로 쳐들어온 야인을 세번 토벌하고 서방의 야인들도 두번 진압하였다.

1574년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탐오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는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5]

1574년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 1583년 7월 특진관(特進官)을 거쳐 1584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83년 비변사 당상으로 있을 때, 왕명으로 인재를 추천케 하자 성혼을 추천하였다.[6]

이후 경상좌병사, 평안도병마절도사, 훈련원도정 겸 부총관, 병조참판, 포도대장, 군기시제조, 비변사당상 등을 역임했다. 1587년 경기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도성을 나서자마자 바로 교자에 올라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터지자 나이 80에 御駕를 西北으로 호위(護衛)하였고, 의주까지 가마를 호종했다. 임금에게 전략 12조를 헌책했고, 그 뒤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올랐다.

사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안장됐다가 다시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으로 이장했다.

일실 오절

임진왜란 때 이전의 세 손자와 두 아들이 전사했다.

이전의 손자(그의 장남 이준헌의 둘째아들) 이복남은 남원성에서 순절했고, 이준헌의 셋째 아들 이인남은 무과 급제후 남도 우후로 신립의 휘하에서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했다. 이준헌의 넷째 아들 이인남은 임진왜란 직후 김화현감으로 올라오는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전의 셋째, 넷째 아들 이경헌이승헌신립 장군의 부관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여 세간에서는 일실 오절이라 칭했다.

가계

  • 증조부 : 이징(李徵)
    • 종조부 : 이지영(李之英)
    • 할아버지 : 이지방(李之芳, 1466년 - 1537년)
      • 아버지 : 이광식(李光軾, 1493년 - 1563년)
      • 어머니 : 함안이씨(1492년 - 1536년, 양간공 이세응(李世應)의 딸)
        • 형님 : 이계변(李繼邊, 요절)
        • 형님 : 이감(李戡)
        • 형수 : 풍천 임씨(豊川任氏, 1515년 4월 12일 - 1556년 2월 1일), 좌참찬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
        • 형수 : 예천윤씨(醴泉尹氏, 1538년 10월 28일 - 1624년 11월 11일), 윤연수(尹延壽)의 딸
          • 조카 : 이희헌(李希憲, 1569년 6월 15일? - 1651년 11월 28일)
          • 조카 : 이유헌(李有憲)
          • 조카 : 이의헌(李宜憲)
        • 동생 : 이용(李庸+戈, 1533년 - 1591년)
        • 제수 : 칠원윤씨(漆原尹氏), 윤리(尹伊)의 딸, 윤탁연(尹卓然)의 누이
        • 제수 : 여산송씨(驪山宋氏), 송맹경(宋孟璟)의 딸
        • 누이 : 우계이씨(羽溪李氏)
        • 매부 : 파평인 윤강(尹綱)
          • 외조카딸 : 파평윤씨(坡平尹氏)
          • 외조카사위 : 광주인 이중경(李重慶), 참판 역임
        • 부인 : 고성이씨(古城李氏), 좌랑 이광택의 딸
        • 부인 : 하빈이씨(河濱李氏), 부장 이윤우의 딸
  • 장인 : 이윤우

주석

  1.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5월 14일(기미)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원적·신종·노경린·조숭조 등을 파직하도록 청하다"
  2.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1558 무오 / 명 가정(嘉靖) 37년) 12월 7일(기유) 1번째기사 "심통원·채세영·원계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3. 명종실록 29권, 명종 18년(1563 계해 / 명 가정(嘉靖) 42년) 11월 7일(임오) 3번째기사 "정원에서 참람하게 휴가를 청한 경기 수사 이전의 체차를 청하다"
  4.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병인 / 명 가정(嘉靖) 45년) 9월 7일(갑오) 1번째기사 "승문원 도제조 등이 구련성의 성보 신축의 문제에 대해 아뢰다"
  5.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1574 갑술 / 명 만력(萬曆) 2년) 3월 15일(경인) 3번째기사 "간원이 탐오한 충청 병사 이전, 병으로 일을 못보는 영월의 권대덕의 파직을 청하다"
  6.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3월 1일(계미) 1번째기사 "비변사 당상들에게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고, 부제학 유성룡이 해직하고 귀향하다"

참고 문헌

  • 중종실록
  • 명종실록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대동야승
  • 국조보감
  • 연려실기술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