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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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무는 원시인들의 군중무용이 조선 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점차로 발달한 것으로, 삼한 시대에는 집단무용으로서의 궤도에 올랐다. 이때에 벌써 수십명이 다체가 되어 몸을 움직이고 발을 딛는 것이 다르고 손짓·발짓도 박자에 맞추었다는 것을 <위지동이전>에서 볼 수 있다. 그 뒤 고려 예종공민왕 때 농악용에 적당한 태평소··꽹과리 등이 수입됨으로써 순수한 향토악기인 소고와 합세하여 더 한층 활발하여졌다. 이로써 고려 중엽 이후로 더욱 진전을 보게 되어 단체무용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노는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으니, 6진(六陣)·수진(水陣)과 8진법(八陣法) 등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 법은 농악무로서,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남한지방에서 성행한다. 이 춤의 연희하는 순서는 진풀이·느진 풍류(風流)·교환(交換)·영산(靈山)·송진(送陣)·가적(歌的)·극적(劇的)·무용적(舞踊的)·해산(解散)굿 등 10여 과장(科場)으로 변화되어 있다.

농악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꽹과리·징·북·장고·소고·호적 등이고, 이 춤의 진행은 상쇠(上釗)가 전담하고 소고와 북·장고 등이 보조역할을 한다. 한국의 궁중무용이나 궁중악이 과거 봉건시대에는 왕공가(王公家)에 예속되어 일부 특권계급의 완상용(玩賞用)에 소용되었으나, 이 농악무만은 발생한 뒤부터 농민 대중들이 키워오고 이끌어 내려온 것으로, 장구한 역사를 가진 호화 발랄한 민속무용이다. 농악무는 전국에 산재해 있어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이 있으나 대동소이하고, 농어촌에서 유일한 오락물일 뿐 아니라 또한 민속적인 세시풍속의 행사에는 반드시 참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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