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야슬라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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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야슬라프 조약- 페레야슬라프에서 1654년 1월에 열린 보그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자뽀로쥐예 카자크인 대표들의 회합

역사적 배경[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거주하는 러시아 정교 신자들은 폴란드 가톨릭으로부터 민족적, 종교적으로 억압받았다.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저항 세력의 동맹으로 보였다. 처음으로 러시아에게 원조를 부탁한 것은 1591년부터 1593년에 폴란드 귀족에 대항하는 봉기를 지휘하던 등록 코사크군의 최고 사령관인 헤트만 크리슈토프 코신키였다. 그 후 헤트만 표트르 코나셰비치 '사하이다치니'(Petro Konashevych-Sahaidachny)가 표트르 아딘초프를 사신으로 보내 자포로지예 군대의 러시아 국적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1622년에 이사이야 코핀스키 주교가 러시아 정부에게 우크라이나의 정교 신자들을 러시아 국민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 1624년에 대주교 이오브 보레츠키도 같은 요청을 했다.

1648년에 보흐단 흐멜니츠키(Bogdan Khmielnicky)의 지휘아래 대규모의 봉기가 발발했다. 평민과 농민으로 구성된 카자크가 일으킨 봉기는 주테 보디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폴란드 군으로부터 계속된 승리를 얻었고, 바르샤바와 즈보로브 평화 조약을 맺어 카자크의 자치권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곧, 전쟁이 재개되었고, 이번에는 반란군에게 성공적이지 못해서 1651년 6월에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코사크 군대 140,000명 중 80,000명이 전사하는 등 거의 괴멸되었다. 1653년에 흐멜니츠키는 봉기의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러시아에게 자포로지예 카자크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1653년 가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젬스키 소보르에서 자포로지예 카자크 군대를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러시아 차르의 결정이 있었고, 1653년 10월 23일(11월 2일)에 러시아 정부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전쟁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