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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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살해 의혹[편집]

측천무후가 딸을 목졸라 죽였다는건 역사적으로 확실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Rosi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2006년 12월 2일 (일) 22:35 (KST)[답변]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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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 특히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고 평가함에 있어 영웅주의 사관은 역사적 실체로부터 동떨어진 분석을 이끌어내기 쉽다. 앞서 지적했다시피 則天武后 정권에 대한 일반의 부정적인 인식은 당 이후 편찬된 유교적 사고가 가미된 史書인 『舊唐書』, 『新唐書』등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비롯한 것이다. 則天武后는 618년 당이 건국된 이후 약 100여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집권하였다. 武周革命은 단지 그녀가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제위에 오르기 위한 정치적 야망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당 초기 정치권력의 주체는 비록 성격이 달리한다고 하지만 멀리 위진남북조시기부터 北周, 隋, 唐건국까지 이어지는 귀족집단이다. 隋가 멸망한 후, 唐高祖 李淵은 분열의 시기를 강력한 군사적 역량으로 극복하고 통일제국 당을 세웠다. 하지만 소위 關隴集團이라 불리는 왕조개창에 공을 세운 권신집단이 황제의 권위와 상존하였고, 이들의 존재는 황제권을 떠받들기도 하면서도 한편 위협하기도 하였다. 당 왕조 개창에서 군사 지도자적 역할을 한 高祖와 太宗의 경우 이들을 통제 하에 둘 수 있었지만, 황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계가 이완되었고, 특히 則天武后 정권 시기에 이르러, 그녀의 정권 탈취와 맞물려 이들 세력은 則天武后와 권력투쟁의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낙양 천도 이후 기층 권력인 關隴集團이 숙청되었고, 대안적 정치 집단으로 산동귀족, 강남귀족 등이 진사과를 통해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후에 점차 과거제가 정비되었으며, 과거출신 관료가 더욱 증가하였다. 이는 舊貴族의 門閥社會에서 新進科擧官僚에 의한 능력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申採湜, 『東洋史槪論』, 三英社, 2006, p.320. 이처럼 정치적 측면에서 則天武后 정권은 기존 정치집단이 가진 귀족적 성격을 해체하고 관료의 지위로 시스템화 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는 기반을 다졌다. 한편 사회경제적으로 고종 말부터 기미지배 체제의 붕괴에 따라 대외적으로 압박이 증가하고, 水災, 旱魃과 같은 천재지변과 일부 지방관의 폭정에 의해 逃戶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則天武后 정권은 집권 기간 동안 둔전 경영, 수리공사, 지속적인 균전제 시행으로 농업, 수공업, 상업의 발전을 이뤄냈다. 조문윤, 왕쌍희 共著, 上同, 2004, p.587.

또한 문화적 측면에서 則天武后는 종교를 정치화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황제즉위를 합리화하였다. 『大雲經疏』를 간행하고, 용문석굴에 화엄사상에 기반을 둔 盧舍那佛像을 건립하였으며, 여러 사찰을 축조하는 등 불교를 이용하여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 당 황실내에서 도교를 중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비록 현종시기에 이르면 다시 도교가 부흥하게 되지만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한 정치권력 차원에서의 적극적 수용은 당의 문화를 다채롭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관리 등용의 주된 창구가 기존의 명경과에서 진사과로 옮아가면서, 당시에 비록 귀족적 문화가 병존하였지만 관료 중심의 문화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황제지배체제를 구축하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다. 이처럼 則天武后의 집권 시기는 기층 권력 내부의 다툼과 더불어 자연재해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 藩部國의 반란으로 대외적 압박이 가속화 되는 상황에서도 민에 대한 지배, 황제권을 강화해나갔으며, 측천무후가 퇴위하고 唐朝로 회귀하는 일련의 정치적 혼란 과정을 거쳤음에도 이어 황위에 오른 玄宗 시기에 開元之治를 이루었다는 점은 측천무후 정권의 긍정적인 역할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則天武后 정권은 정관시기와 개원시기의 架橋역할을 하면서, 이후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제국의 면모를 풍미하는 唐의 역량에 시기적절한 자양분을 제공했다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듬어서 사용해주세요. --케골 2014년 6월 18일 (수) 14:16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