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그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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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의 초상화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 1843년 6월 15일 ~ 1907년 9월 4일)는 노르웨이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였다. 베르겐에서 출생하였으며, 극작가입센과 비교할 정도로 유명한 민족주의 음악가이다.

생애[편집]

그리그의 증조부는 스코틀랜드에서 노르웨이의 베르겐에 이주해 온 사람이며, 어머니는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므로 그는 최초의 음악교육을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15세 때 독일에 유학하여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 모셸레스, 리히터, 라이네케 등에게 배웠다. 당시 독일에 유학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음악가의 대부분은 그대로 독일에 머물러 독일의 음악가들과 어울리고 싶었으나 그리그는 졸업 후 곧 스칸디나비아로 가서 가데(게제)를 알게 되었고 다음 해에는 노르드라크와도 만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을 품게 되었다. 1867년 4촌누이인 가수 니나 하게루프와 결혼하여 귀국, 노르드라크와 협력하여 1869년 오슬로 크리스티아니아에 음악협회를 설립, 1880년까지 그 지휘를 맡아 보았으며, 한편으로 민족색이 풍부한 명곡을 차례로 내놓았다. 1880년 이후에는 고향인 베르겐으로 물러나와 작곡에 전념하였고 그의 간단한 작업장이 지금도 국립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곳은 피오르라고 하는 빙하로 생긴 골짜기가 강입구로 된 해안선 근처까지 뻗어나온 것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서, 숲 사이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그는 작곡가로서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또 지휘자로서 몇 차례나 외국에 갔으나 본거지는 늘 조국이었다. 만년의 약 10년간은 학생 때 앓은 폐병이 재발하여 어두운 나날을 보내야 했고 64세 때까지 살다 출생지에서 사망했다. 유골은 작업장 아래에 있는 피오르의 벽면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안치되었다.

작품 세계[편집]

그리그는 동년배인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와 같은 선이 굵은 작곡가는 아니나 섬세한 서정시인적인 음악가였다. 그 때문에 오페라교향곡은 결국 한 곡도 완성하지 못하였고, 교향곡 이외의 소나타 형식을 사용한 대작에서도 성공했다고는 하기 힘들다. 구성력이나 주제의 논리적인 발전에 약한 면이 있었다. 오직 하나의 예외로는 피아노 협주곡(1868)으로, 이는 25세경의 젊었을 때의 것이다. 그리그의 특징은 첫째로 생애의 거의 모든 시기에 걸쳐 계속해서 작품을 쓰고 있었으므로 가곡을 보면 그의 예술의 발자취를 잘 알 수가 있다. . 가곡 다음으로는 피아노의 소곡이 중요하며 10권 66곡으로 된 <서정소곡집> 등 그 수도 가곡만큼 많다. 관현악곡 분야에서도 성공한 것은 피아노의 <서정소곡집> 가운데에서 4곡 정도는 자기가 골라내 오케스트레이션한 <서정모음곡>(1891)이라든가 입센의 극에 곡을 붙인 <페르귄트>의 음악(1874-1875) 등 소곡의 모음이다. 그의 실내악곡 중에서는 비교적 연주기회가 많은 제3바이올린 소나타(1878)도 실질적으로는 노르웨이의 노래와 춤의 접속곡 같은 데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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