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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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도리아

안드레아 도리아(이탈리아어: Andrea Doria, 1466년 11월 30일 - 1560년 11월 25일)는 제노바도리아 가문의 출신으로 제노바 출신의 해군 용병 및 제독.

어린시절[편집]

이탈리아 오네글리아(Oneglia)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아버지를 잃고 로마의 친척에게 보내어지게 되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경호원으로 입신했다. 본래는 육군이었으나, 40대가 넘은 1512년 처음 해군으로 전직하게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해군으로의 경력[편집]

바다로 나간 안드레아 도리아는 주로 바르바리 코르세어들의 갤리들과 싸우며 명성과 경력을 쌓아나갔고, 교황청의 해군함대, 프랑스의 해군 제독 등을 거치면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당시 유럽의 국가들은 해군을 육성하기보다는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이런 용병들은 배와 선원, 무기를 자체적으로 구비했다. 따라서 용병함대가 어느 나라와 계약을 맺느냐에 따라 유럽 해군의 균형이 크게 변동하는 상황이었다.

정치변동으로 제노바에서 축출된 이후, 안드레아 도리아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계약을 맺었고, 1527년 프랑스 군대를 부추겨 제노바를 침공했다. 파비아 전투 이후 한동안 교황 클레멘스 7세 아래에서 일했다가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되자 다시 프랑스에 돌아왔다. 그러나 1528년 안드레아 도리아는 용병 계약비 문제로 프랑수아 1세와 충돌했고, 프랑스를 떠나 에스파니아와 새롭게 계약을 맺었다. 1528년 카를 5세에게 안드레아 도리아는 에스파니아의 해군 제독(General Admiral of Spain)으로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며, 1531년 멜피 후작(Principe di Melfi)으로 봉해졌다. <출처=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3권, 까치>

제노바의 독재자[편집]

제노바는 본래 도리아, 스피뇰라, 피에스키, 그리말디의 네 개의 귀족 가문이 정치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프랑스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안드레아 도리아가 에스파냐로 넘어가면서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막강한 해군과 정치력을 통해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여기에 반발한 피에스키 가문의 주도하에 1547년 암살 시도가 벌어졌으며, 그 와중에 안드레아 도리아의 조카 자네티노 도리아가 암살당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반란 음모를 진압한 뒤, 8년에 걸쳐 이들 음모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처형했다. 하지만 이같이 해군 세력에 기댄 독재 정치는 안드레아 도리아 1대로 그쳤으며, 그의 조카손자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이후로 약화된다.

코르세어와 대결[편집]

안드레아 도리아는 카를 5세지중해 공격에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1535년 그는 에스파냐 함대를 이끌고 튀니스를 공격하여 하이레딘을 격퇴했으며, 1538년 에스파냐, 로마 교황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연합함대 6만 명을 이끌고 프레베자에서 하이레딘오스만 투르크 함대와 대적했으나, 함대 내의 단결 부족과 불리한 정황을 탓하며 본격적인 해전은 벌이지 않고 베네치아 함대만 피해를 입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후 30여 년간 레판토 해전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투르크는 지중해 제해권의 우위를 가지게 된다.

이후의 안드레아 도리아[편집]

프레베자 해전 이후와 하이레딘이 죽은 뒤, 안드레아 도리아는 여전히 지중해 세력의 실세로 남았다. 1552년 80이 넘은 나이로도 해군을 이끌고 폰자 섬에서 드라구트 레이스와 거듭 충돌을 벌였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555년 그가 은퇴한 뒤로 그의 함대는 조카손자이자 훗날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는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어받았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1560년 11월 25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 제노바산 마테오 성당에 그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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