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고트 전쟁의 일부)
Battle of Adrianople 1.png
날짜 379년 8월 9일
장소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
결과 고트족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동로마 제국 고트족 연합군
지휘관
발렌스 프리티게른
알라테우스
사파렉스
병력
1만 5000명 ~ 3만 명 1만 ~ 2만 명
피해 규모
1만 ~ 2만 명 알려지지 않음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378년 8월 9일 동로마의 황제 발렌스고트족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황제 발렌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고트족은 로마군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으로 이 전투의 패배로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배경[편집]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위협을 받은 고트족]은 동로마 제국의 발렌스 황제에게 로마 제국의 영토로의 이주를 허가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발렌스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트라키아로 이주할 것을 허가하고 지방 정부에게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로마의 동맹 부족이 되어 안정적으로 정착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총독 루키피누스는 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나우 강을 건너온 고트족의 재산을 빼앗고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아 이들은 거의 기아 상태에 빠졌다.

377년 여름 고트족 난민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저항에 나섰다. 그들은 마리아노폴리스로 몰려가서 루키피누스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총독 루키피누스는 거절하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해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루키피누스는 오히려 고트족에게 패하여 달아났고 발렌스는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

동서 로마 제국의 대규모 증권군에도 불구하고 고트족과 로마군 어느 쪽도 분명한 승리를 이루지 못한 채 2년이 경과하였다. 378년 봄, 발렌스는 그라티아누스의 약속을 받고 마침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향했다. 발렌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5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라티아누스도 증원군을 더 보냈으나 알레마니족라인강을 넘어 쳐들어오자 병력을 다시 불러들였고 갈리아에서 알레마니족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진군하여 상당한 규모의 고트족을 격퇴하고 서방의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의 경과[편집]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증원군의 사령관 리코메레스는 발렌스에게 자신의 증원군이 도찰할 때까지 대규모 전투를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발렌스는 독자적인 정보망으로 적군이 고작 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휘하장군 세바스티아누스가 즉각 공격을 주장하자 그 의견에 동의하여 공격에 나섰다.

8월 8일 고트족의 족장 프리티게른은 로마군의 정황을 파악하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발렌스는 아군의 숫적 우세를 믿고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발렌스 최대의 실수였다.

다음날 전투가 개시되었다.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성문을 나선 로마군은 적을 발견하자 마자 급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미처 전열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시작한 공격으로 로마군은 처음부터 밀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전투단위와 명령체계가 분명한 반면 부족단위의 고트족은 개별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고트족은 짐수레를 둥글게 둘라싸고 방어진을 취했고 가운데에 함께 온 가족과 재산을 놓고 필사적으로 로마군을 공격하였다. 로마군은 각 전투 단위마다 기능에 따라 효과적으로 응대하는 전략을 취하지 못하고 고트족에게 격퇴당했으며 상대를 야만족이라고 얕보았던 발렌스는 전투 경험이 없었다.

고트족 기병에 밀린 로마군은 대대장 35명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했다. 로마군 총사령관 세바스티나누스와 부사령관 트라야누스는 전사했다. 발렌스도 그 전투에서 죽었는데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호위대에서 떨어져 들판의 농가의 오두막에 숨어들었다가 고트족에세 불에 태워져 죽었다고도 한다.[1]

결과[편집]

고트족은 로마 병사들이 값나가는 물건을 놓고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하러 갔다. 하지만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패잔병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도망쳐서 방위에 앞장서고 있었다. 결국 공략을 단념한 고트족은 그대로 로마 가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향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로마 제국 동방의 수도였고 게다가 방위 면에서는 만점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트족은 이 대도시를 공략하는 것도 일찌감치 단념했다.[2]

영향[편집]

이 전투의 패배는 로마인에게 아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군은 더이상 천마무적의 불패가 아니며 야만족은 로마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황제가 전투에서 죽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참패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전의 패배는 곧 로마군은 일어나서 복수했지만 이 전투의 패배는 결코 설욕되지 않았다. 결국 로마의 게르만화는 더 이상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발렌스의 뒤를 이어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고 그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결국 로마 영토 안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석[편집]

  1. 시오노 나나미는 발렌스 황제가 불에 타 죽었다고 저작《로마인 이야기 14권: 그리스도의 승리》에 기록하였다.
  2.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4권: 그리스도의 승리》. 3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