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터 요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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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터 요새 전투
(남북 전쟁의 일부)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
날짜 1861년 4월 12일 ~ 4월 14일
장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결과 남부 연합 승리
교전국
US flag 35 stars.svg
아메리카 합중국
CSA FLAG 4.3.1861-21.5.1861.svg
아메리카 연합국
지휘관
미국 로버트 앤더슨 CSA FLAG 4.3.1861-21.5.1861.svg 피에르 보우리가드
병력
85 500
피해 규모
전사 1, 사상 3 0


섬터 요새 전투(Battle of Fort Sumter)는 1861년 4월 12일부터 4월 14일까지 진행된 전투이다. 남북 전쟁의 발단이 된 전투지만, 개전 이전의 작은 전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남북 전쟁에 있어 중요한 전투의 하나이다. 섬터 요새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찰스턴을 지키고 있던 요새 중 하나로, 항구 수로의 정면에 위치해 있었다.

배경[편집]

1860년 12월 20일, 링컨이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한 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미합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그리고 1861년 2월경 6개의 남부 주가 유사한 강령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2월 7일 7개의 주는 아메리카 남부 연합이라는 임시 헌법을 채택하고, 앨러배마 주 몽고메리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남북 전쟁의 조짐이 짙어질 무렵, 남부 지방은 대부분이 남군에 가입하고 이에 따라 각 요새도 남군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섬터 요새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 등은 미합중국에 계속 충성할 것을 결정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날, 섬터 요새 수비대 사령관 앤더슨 소령에게 편지가 도착 즉시 각료 회의가 열렸다.. 7명의 장관 중 5명까지도 반대했지만, 링컨은 적지에 서 자신들에 충성을 맹세한 부하를 위해 지원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원 (식량 만)을 결정한다. 탄약만 지원했다는 자료도 많이 존재한다.

경과[편집]

남군 사령관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은 철수를 요구했지만, 북군 요새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 등은 높은 사기와 충심으로 이를 거부했다.

1861년 4월 12일 오전 4시 30분, 북군의 지원선박이 요새에 접근하자, 항구 북쪽에 있었던 남군의 존슨 요새에서 포격이 이루어졌다. 이 포격으로 식량지원선은 요새에 접근하지 못하고 보급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본격적인 남북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간헐적인 분쟁이 있었지만, 남군과 북군이 직접 대치한 전투는 이것이 최초였다. 앤더슨 소령은 보급이 없으면,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한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이전에도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이 이전에 북군 측은 전투를 피하도록 남군 측에 통보했다.

4월 13일 요새가 남군 포병 중대의 포격을 받았지만, 북군은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다.(물론 불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월 14일, 오후 2시 30분 무렵 탄약 고갈로 앤더슨 소령은 요새에서 후퇴하면서, 사실상 포기를 결정했다.

섬터 요새[편집]

이 요새는 항구 수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즉 섬터 요새의 존재 의의는 수로를 통해 침입하는 적함을 정면에서 막아 격퇴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대포는 육상과 선상에서 모두 포격을 가할 수 있었지만, 쌍방 포격전에서는 배가 훨씬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은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링컨이 열었던 대책 회의에서 일곱 장관 중 다섯 명이 지원에 반대한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 였다.

기타[편집]

Photograph of a faded and torn United States flag
섬터 요새의 깃발
  • 남군 사령관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은 북군이 성조기를 향해 마지막 예포를 발사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50문의 대포 중 1문이 폭발했다.
  •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요새의 상징인 성조기를 뉴욕으로 가져왔다. 보우리가드 장군은 사관학교의 은사인 앤더슨 소령이 성조기를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다. 그때 가져간 성조기는 북군에서 선전을 위해 이용되었다.
  • 이틀 전투로 남부군이 점령했지만, 남북 전쟁의 중반에서 종반으로 접어들자, 오히려 포위되어 고전을 했다.

결과[편집]

북군의 보급은 실패로 돌아갔고, 두 척의 배가 손상되어는 항복을 했다. 남군의 전사자는 전무하며, 북군은 1명이 전사하고, 3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철수 시 예포의 폭발로 인한). 이것은 포격전으로는 매우 드문 예이다. 그러나 남군 측이 철수를 용인했기 때문에 별다른 사상자없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남군은 포격으로 북군의 보급로를 끊고, 요새를 확보했다.

현재[편집]

1948년에 국영 기념물로 섬터 요새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관련 항목[편집]

바깥 고리[편집]

좌표: 북위 32° 45′ 09″ 서경 79° 52′ 30″ / 북위 32.75241° 서경 79.87496° / 32.75241; -79.87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