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Kys951/작업실/이오지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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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방어 계획[편집]

지하 진지 구축[편집]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1944년 5월치치지마에 부임했다. 당초에는 요새가 있는 치치지마에 사령부를 두기로 했었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은 면밀히 생각한 결과 미군은 이오지마로 올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즉시 무방비로 있던 이오지마에 사령부 및 제109사단을 이동시켰다. 제공권과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진격하고 있는 미군에 대해서, 이오지마가 버틸 수 없는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쿠리바야시 중장은 미군에게 최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면서 진격을 허용해,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하루라도 늦추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방어 계획의 첫번째 단계로서 군인과 군속을 제외한 민간인의 피난을 7월 후반까지 완료시켰다. 두번째로, 섬의 전면적 요새화를 계획했다. 지상 설비는 함포 사격에 견딜수 없기 때문에 천연 동굴과 인공 갱도 건설을 통해 최대한 끈질기게 사수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광범위한 지하 갱도가 건설되었다.

태평양에서 일본이 점령한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지하 갱도 건설을 통한 방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오지마 수비대를 이 전술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 섬 전체의 시설을 지하를 통해 이동할수 있게 하는 총 연장 28km의 갱도가 계획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토에서 광산 기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쿠리바야시 중장은 전체 시간의 70%를 훈련, 30%를 지하 진지 건설에 종사하도록 명령했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공사의 효율을 위해 작업중에는 상관에게 경례를 생략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하 요새 건설 공사는 곤란함의 연속이었다. 병사들은 고된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유황가스에 질식사 할 수도 있는 위험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섭씨 30도에서 50도 정도의 지열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1인당 작업시간은 5분을 넘길수 없었다.

갱도의 깊이는 약 12m에서 15m정도였으며, 길이는 수킬로미터에 다달았다. 지하실의 종류는 소인원 수용이 가능한 갱도에서 부터 300명에서 400명까지 수용할수 있는 방까지 다양했다. 출입구는 근처에서 폭발하는 포탄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받기위해 세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병력이 갱도에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해 복수의 출입문과 상호 연락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하실의 대부분에는 유황 가스가 발생하고 있어 환기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섬의 북쪽 취락 근처 약 500m 북동 지점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사령부는 지하 20m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갱도에 의해 접속된 각종 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섬에서 2번째로 높은 산에는 무선소와 기상 관측소가 설치되었다. 그곳의 바로 남동쪽 지하에는 이오지마의 모든 대포를 지휘하는 대령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 외 각각 중요한 거점에도 지하 진지가 설치되었다. 스리바치야마산 해안 가까이에 건설된 토치카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두께 1.2m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오지마 제1방어선은 상호적인 지원이 가능한 몇겹으로 배치된 진지로 구성되어 있어 북서 해안에서 부터 남동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토치카가 건설되어 있어 니시 다케이시(西竹一) 중령의 전차 방어선이 이곳을 방어하고 있었다. 제2방어선은 이오지마의 최북단에서부터 남쪽 수백미터까지 취락을 이용해 동해안에 도달하는 방어선이었다. 제2방어선은 제1방어선보다 소규모였지만 일본군은 자연 동굴이나 지형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해 방어선을 강화시켰다. 스리바치야마의 방어선은 해안포 및 토치카로 부터 독립되어 있는 반(半)독립 상태 방위구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전차 등이 접근할수 있는 경로에는 모두 대전차 방어호가 굴착되어 있어 결코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1944년 말에 이오지마 방어군은 화산재와 시멘트를 혼합하면 고품질의 콘크리트가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해, 이오지마의 진지 구축에 이를 활용했다. 그러나 미군의 잠수함과 항공기의 방해에 의해 건설 자재가 신속히 공급되지 않아 건설이 예정된 28km중 결국 18km밖에 건설하지 못했으며, 사령부와 스리바치야마를 연결할수 있는 갱도도 미완성인채로 전투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하 진지들은 소기의 역할을 최대한 완수하게 된다.

병력 증강[편집]

일본군의 증원 부대도 서서히 이오지마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우선 혼성 제2여단 5,000명을 치치지마에서 이오지마로 이동시켰다. 여단장은 12월에 다른 소장과 교대한다. 사이판 함락에 따라 보병 제145연대 2,700명도 이오지마로 오게된다. 해군에서는 우선 제204건설 대대 1,233명이 도착해 신속하게 지하 진지 건설공사에 착수했다. 8월 10일, 이시마루 니노스케 해군 소장이 이오지마로 오면서 건설은 탄력을 받게되고, 항공대 및 지상 정비원 2,216명도 도착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오지마에 증강된 병력은 포병이었다. 1944년 말까지 75mm 이상의 대포 361문이 도착해 배치되게 된다. 320mm 박격포 12문, 150mm 박격포 및 81mm 박격포 65문, 80mm 이상의 연안포 33문, 75mm 이상의 고사포 94문등이 배치되었다. 게다가 200문이 넘는 20mm 및 25mm 대공 기공포와 69문의 37mm 및 47mm의 속사포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일본군의 신병기, 로켓포 70문도 도착하게 된다. 이 무기들은 무게가 90kg 정도였는데, 20cm 탄과 7km 이상의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40cm탄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무기들의 장점은 발사후 바로 지하진지로 대피할수 있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화력은 통상 일본군 1개 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화력의 4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만주국에서 부산으로 이동하고 있던 전차 제26연대도 배치되었다. 연대장은 남작 니시 다케이시 중령으로 부대는 병력 600명과 전차 28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대는 수송선을 타고 7월 중순에 출항했지만 7월 18일 수송선은 치치지마에서 250km 떨어진 해상에서 미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때 전사자는 2명이었지만, 전차는 모두 바다에 잠기게 되었다. 보충은 12월에 행해졌으며, 최종적으로 22대가 보충되었다. 니시 다케이시 중령은 당초 전차를 기동 병력으로 운용하길 기대했지만 사령부에서 회의 끝에 전차는 고정 포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전차는 분해되어 고정 포대로 사용되었으며 차체를 묻거나 포탑을 분해해 숨켜 교묘하게 은폐했다.

미군은 잠수함과 항공기를 통해 많은 수송선을 격침시켰지만 1945년 2월까지 병력 증강은 계속된다. 최종적으로 쿠리바야시 중장은 육군 및 해군 21,000명을 지휘하게 된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해군의 지상 전투요원에 대해 매우 신뢰하고 있지 않고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군 병력은 전혀 신뢰가 되지 않는다. 해군 지상 전투요원은 해체하고, 육군에게로 그 병력을 돌려야 한다." 또한 쿠리바야시 중장은 육군과 해군의 세력 싸움에 대해 "해군과 육군의 세력 싸움을 일소해, 양군은 일원적으로 둘 필요가 있다." 등 육군과 해군의 통합을 요청하는 보고를 하고 있다.

방어 전술[편집]

일본군이 총력으로 섬 전체를 요새화를 진행시키고 있을때, 쿠리바야시 중장은 방어 전술을 세밀하게 가다듬고 있었다. 제31군 사령관 오바타 중장은 상륙시 해안쪽에서 방어한다는 당시의 원칙에 따라 해안 근처에서의 전투를 명령했다. 그러나 쿠리바야시 중장은 해안에서의 저항은 미군 함포 사격에 의해 결국 몰살당할 것이라고 말하며 거부한다. 실제로 당시 태평양의 여러섬에서 미군의 함포 사격에 의해 해안 방어를 하고 있던 일본군은 몰살 당했지만, 아직 일본군은 이 전술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있지 않았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이를 정통으로 바로보고, 이를 거부했다. 결국 쿠리바야시 중장의 전술은, 미군에게 '가장 괴로운 전투'가 되게 된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다음과 같이 전술을 세운다.

  1. 미군에게 위치나 비밀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본군의 대포는 미군의 상륙 준비 포격 동안에 발포를 실시하지 않는다. 또한 미군의 함정에 대한 포격도 실시하지 않는다.
  2. 미군의 상륙당시, 해안에서는 저항하지 않는다.
  3. 상륙 부대가 약 500m 정도 내륙으로 다가오면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화기의 공격과 더불어, 해안의 북쪽에서도 포격하며 남쪽에서도 스리바치야마에 위치한 병력이 포격을 같이 한다.
  4. 상륙 부대에 가능한 최대의 타격을 입힌후에 대포는 비행장에서 북방으로 이동한다.

쿠리바야시 중장이 채용한 전술은 게릴라전을 통한 상륙 부대의 혼란을 노린 것이었다. 대포는 스리바치야마의 경사면과 비행장 북측에 위치해 해상에서는 사각지대였다. 식략과 탄약은 지구전에 대비한 2.5개월 분이 비축되었다. 1945년 1월에 발표된 최종 작전은 서로 협력하는 진지 구축을 명령한 것으로, 병력의 급격한 감소로 연결되는 대규모 역습, 철퇴 및 만세 돌격 등도 모두 금지시켰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수개월간, 쿠리바야시 중장은 병원의 건설과 훈련 시간 배분에 분주했다. 훈련에 많은 시간을 배분하기 위해 작업을 일시 정지하기도 했다. 12월 초순, 작전 명령을 통해 1945년 2월 11일을 방어 준비 완성 목표일로 지정했다. 1944년 12월 8일에 미군 항공 부대는 이오지마에 80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지만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이후, 미군의 B-24 폭격기가 거의 매일 저녁 이오지마 상공에 나타났으며, 항공모함순양함오가사와라 제도에 출현했다. 빈번한 공습으로 작업에 많은 방해가 되어 수비대의 수면시간이 부족해졌지만, 계속해 총력적으로 작업을 계속 진행시키고 있었다. 1월 2일, 수십기의 B-24 폭격기가 비행장을 공습해 큰 피해를 입혔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은 응급수리에 600명이 넘는 인원과 11대의 트럭 및 2대의 불도저를 투입해 비행장을 불과 12시간 후에 다시 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지만 이 비행장에는 사실 날릴 비행기가 전무했다. 이를 쿠리바야시 중장은 결별 전보를 통해 강하게 비판했는데 비행장 수리는 사실 해군의 요청 때문에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수리한 비행장을 사용한건, 결국 미군이었다.

1945년 1월 5일, 지령소에는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군의 연합 함대가 괴멸했으며, 곧 이오지마가 미군의 침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을 전한다. 2월 13일, 일본 해군의 정찰기가 사이판에서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170척의 미군의 큰 선단을 발견한다. 오가사와라 제도의 일본군 전(全) 부대에 경고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 이오지마도 요격 준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미군의 상륙 계획[편집]

1944년 10월 9일,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 장관 채스터 니미트(Chester William Nimitz) 해군 대장은 작전 준비를 명령한다. 전투 참가 병력은 제5함대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로스(Raymond Ames Spruance) 해군 대장 지휘하의 5개 부대였다. 이오지마 파견군 총사령관에는 제51 임무 부대 사령관 리치몬드 터너(Richmond Kelly Turner) 해군 중장이 임명되어 제53 임무 부대, 전함을 포함한 수상 타격 부대인 제54 임무 부대, 고속 전함 2척, 항공모함 12척으로 구성된 제58 임무 부대, 상륙 부대인 제56 임무 부대가 그 지휘하에 들어갔다. 또, 이오지마 전장에 제임스 포레스탈(James Vincent Forrestal) 해군 장관이 동행 시찰하기로 한다.

상륙부대는 슈미트 소장 지휘하의 제5 수륙 양용 군단(해병대 제3, 제4, 제5 해병 사단)이었다. 제3 해병 해병 사단은 전투 등으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1944년 가을 당시에는 아직 괌에 있어 잔존 일본군 소탕 작전에 종사하고 있었다. 상륙 제4, 제5 해병사단(제26연대 제외)이 우측으로, 제5 해병 사단이 좌측에서 상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제3 해병사단은 D-day+3일까지 예비 병력으로 대기하기로 되어있었다. 작전 계획은 근거지의 신속환 확보, 제5 해병 사단은 스리바치야마의 신속한 점령, 제4 해병 사단은 우측면의 조속한 점령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두 거점의 점령에 시간이 걸린다면, 양방향으로부터 포격을 받기 때문에 상륙 부대에 다수의 사상자가 나올것으로 예상되었다.

동해안에는 큰 파도의 가능성이 있어 서해안으로 상륙하는 대체 계획도 세울수 있었지만, 북부서의 계절풍에 의한 파도의 위험성이 더 많이 고려 되어 실행은 취소되었다. 동해안은 스리바치야마로부터 북동쪽까지 이어지는 약 3km 정도의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은 이것을 500야드 마다 7개 구역으로 분할해 왼쪽에서 오른쪽(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해 그린(Green) 구역, 레드(Red) 1구역, 레드 2구역, 옐로(Yellow) 1구역, 옐로 2구역, 블루(Blue) 1구역, 블루 2구역으로 분할했다.

제5 해병 사단의 제28 해병 연대가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그린 구역에 상륙해 스리바치야마에 진격한다. 그 동쪽에는 제27 해병 연대가 상륙해 서해안까지 도달한 후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작전 구역 'O-1 라인'까지 전진한다. 제26 해병 연대는 예비 병력으로 대기한다. 제4 해병 사단은 제23 해병대가 옐로 1구역과 옐로 2구역에 상륙해서, 비행장을 점령하면서 북동쪽으로 진격해 비행장의 일부와 작전 구역 'O-1 라인'을 제압한다. 제25 해병대는 블루 1구역에 상륙한 후, 비행장과 블루 2구역을 점령한후, 북동쪽 방향으로 진격한후 작전 구역 'O-1 라인'에 도달한다. 제24 해병대는 D-day날에는 예비 병력으로 남겨둔다.

1945년 2월 16일, 작전 개시가 몇일 남지 않은 기자 회견에서 스미스 중장은 '공략 예정 기일은 5일, 사상자는 1만 5천명을 각오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참가 병력[편집]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한 전투 병력은 다음과 같다.

일본[편집]

  • 육군(총병력 13,586명)
    • 오가사와라 군단(제109사단, 군단장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 참모장 : 타카이시 타다시 대령)
      • 오가사와라 군단 직할 부대
        • 독립 보병 제17연대
        • 보병 제145연대
        • 전차 제26연대(연대장 : 니시 다케이치 중령)
      • 혼성 제2여단
        • 독립 보병 제309대대
          • 기관총 중대(중대장 : 아베 타케오 중위) - 아베 중대장은 포로가 되었지만, 태평양 전쟁 후 이오지마 협회 상임 이사가 되어 전몰자 위령에 종사한다.
        • 여단 포병
        • 여단 야전 병원 - 4월 16일에 환자를 동반하며 미군에 투항한다.
  • 해군(총병력 7,347명)
    • 오가사와라 군단 직할 부대
      • 제27 항공 전대
      • 이오지마 경비대
      • 남방 제도 해군 항공대
      • 제204 진지 설치 대대

미국[편집]

전투의 경과[편집]

미군의 강습 준비[편집]

마리아나 제도로부터 제7항공군의 B-24가 상륙 준비를 위해 74일간의 연속 폭격을 실시했지만 수평 폭격에서는 핀 포인트 공격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본군 주둔지에의 데미지는 적었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군수품을 운반하는 일본군의 2등 수송함은 모두 격침했다. 해병대는 10일 이상의 준비 함포 사격을 요청했지만, 함대는 오키나와 지원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준비 함포 사격 기간을 3일로 단축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오지마와 일본 본토와의 차단을 위해 일본 본토 공습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참가를 하기로 결정되어 있던 미국의 새로운 항공모함 함대는 2월 중순까지는 보급을 하지 못했고, 또한 오키나와 상륙 개시까지의 일정이 가까워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오지마에 B-29의 전력을 다수 투입할수 없었다. 그리고 주(主) 작전인 오키나와 공략의 전력을 감축 시키면서까지 이오지마에는 병력을 투입할수 없다고 여겼다. 이 판단은 상륙 후의 해병대의 고전의 한 요인으로 작용되었다.

2월 16일, 미국 고속 항공모함 기동 부대는 이오지마 상륙의 전초전이라 말할수 있는 일본 본토 공격을 함재기에 의해 2일간 실시했다. 이 때 40기 정도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하는 성과를 거뒀는데, 이 때 미군은 일본측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 판단하고 이오지마 상륙 작전을 개시한다.

미군 상륙[편집]

1945년 2월 16일(일본 시간), 미국의 이오지마 파견군은 이오지마 근해에 집결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전함 6척, 순양함 5척은 각 담당 지구를 철저히 포격했다. 그리고 상선을 개조한 미군 호위 항공모함은 포탄들이 떨어진 자리를 관측하고, 개별 진지의 격파를 실시했다. 통상탄은 거의 효과가 없어서, 로켓탄이 사용되었다. 효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 미군은 12척의 보병 상륙용 작은 배를 동해안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은 스리바이챠마의 중포를 이용해 해상을 포격, 9척을 불능 상태로 만들고 3척을 대파시켰다. 이 공격에 의해 중포의 진지 장소를 어느정도 알게된 미군은 '네바다'(USS Nevada)를 이용해 함포 사격을 실시한다. 결국 스리바치야마의 주요한 대포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이 포격을 본 미군 병사는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일본군은 있는거야?'라고 묻는다. 당시에는 미군의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답은 철저한 괴로움이었다.

19일 오전 6시 40분, 전함의 함포 사격이 실시되었으며, 8시 05분에는 B-29 폭격기 120기에 의한 폭격(다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이, 8시 25분 부터 9시 까지는 다시 함포 사격이 실시되었다. 9시, 제4 해병 사단과 제5 해병 사단의 제1진이 상륙을 개시했다. 해안에서의 일본군 저항은 없었으며 해병대는 원활한 상륙을 의외로 여기며 내륙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군은 지하 갱도 안에서 함포 사격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오전 10시가 넘어서 일본군은 일제 사격을 개시해 해병대의 선두에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금새 제24, 제25 연대는 25%의 사상자를 냈으며 제1진에 포함되어 있던 전차 56대중 28대가 파괴되었다. 이정도의 피해는 전례가 없었다. 이오지마의 토양은 무너지기 쉬운 화산재 때문에 교통편도 거의 전무했으며, 해병대는 참호를 팔수도 없었다. 19일에만 해병대는 전사자가 501명, 전상자가 47명, 부상자가 1,755명이었다.

저녁까지 해병대 30,000명이 상륙했다. 해병대는 지금까지 태평양의 다른 작은 섬들에서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만세 돌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오지않았으며 일본군이 실시한 행동운 수류탄을 이용한 습격과 야간 포격 정도였다. 해변에 있던 미군 물자의 다수가 공격에 의해 손실되어서 해병대는 손해를 입는다. 그러나 그것도 해병대가 철저한 경계를 서기 시작하면 효과는 적어지기 시작해 돌아오지 않게 되는 일본군 병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스리바치야마 전투[편집]

20일, 준비 폭격후에 해병대 1개 연대가 스리바치야마로, 3개 연대가 주방위선을 향해 전진한다. 해병대는 저녁까지 비행장을 제압해, 스리바치야마와 쿠리바야시 중장과의 연락선을 차단한다. 스리바치야마의 경사면 1m 마다 전투의 연속이었다. 포격은 일본군 지하 진지에 대해서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며, 해병대는 화염 방사기와 수류탄으로 토치카를 처리해가며 전진했다. 일본군에서는 스리바치야마 수비 대장이 전사했으며 이치마루 소장은 대본영에 보고를 보냈다.

21일, 예비 병력인 제3 해병 사단이 상륙했다. 같은날 지바현 카토리 기지로 부터 출격한 '혜성' 급강하 폭격기 12기, ' 천산' 함상 공격기 8기 등 총 32기의 가미카제가 공격을 한다. 이 특공대는 일본 본토에서 처음 출격한 것으로 이오지마 근해의 미국 함대에 돌입해 호위 항공모함, 정규 항공모함 대파 등의 전과를 올린다. 혼란한 상황이 벌어지게된 미국 함대는 '공격을 받고 있다. 구원을 요청한다.'라고 발신 했는데, 이 무선은 일본군 수비대에게도 감청되었다. 그 후에도 일본군은 상륙 부대 및 함선에의 폭격을 몇차례 실시한다. 이 광경은 이오지마 수비대에도 목격되었다.

22일, 제4 해병 사단은 제3 해병 사단과 교대한다. 스리바치야마에서는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군은 화염 방사기로 갱도를 다 태웠으며, 화염이 닿지 않는 갱도에 대해서는 연기로 출입구의 위치를 확인해 불도저로 입구를 막거나, 그리고 가솔린을 넣어 발화시키는 등의 공격을 했다.

23일 오전 10시 15분, 결국 제5 해병 사단은 스리바치야마 정상에 도달해 성조기를 게양했다. 오후 12시 15분에 재차 5x8피트짜리 성조기를 내걸었으며 AP 통신의 사진가 조 로젠탈이 그 순간을 포착한다('이오지마의 성조기'(Raising the Flag on Iwo Jima)). 포레스탈 해군 장관은 해안에서 이 광경을 보면서 옆에 있던 스미스 중장에게 '이것으로도 해병대는 500년을 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반격해 성조기를 내리고 일장기를 내걸었다. 그러나 다시 미군이 탈환해 성조기를 내거는등 쟁탈전이 2번에 걸쳐 전개되었다. 마지막으로 걸린 일장기는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