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라 요리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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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라 요리히사
相良 頼央
요리히사의 초상화. 사가라 신사 소장
요리히사의 초상화. 사가라 신사 소장
무사 정보
시대 에도 시대 중기
출생 겐분 2년 7월 3일 (1737년 7월 30일)
사망 호레키 9년 8월 3일 (1759년 9월 26일)
개명 요리보(頼母, 아명)
우치다 시게우지(内田滋氏, 초명)
사가라 요리히사(相良頼央)
별명 쇼지로(庄次郎)
계명 祥麟院殿華岳仁封
막부 에도 막부
히고국 히토요시번 번주
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관위 종5위하 토토미노카미
씨족 사가라씨
부모 아버지 : 사가라 나가아리
어머니 : 오요
양아버지 : 사가라 요리미네
공식문서상 아버지 : 사가라 요리나오
공식문서 상 어머니 : 타메히메
자녀 양자 : 미츠나가
묘소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 간세이지

사가라 요리히사 (일본어: 相良 頼央 さがら よりひさ[*])히고국 히토요시번 8대 번주이다.

생애[편집]

겐분 2년 (1737년) 7월 3일, 6대 번주 사가라 나가아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인 오요이다. 나가아리 사망 시점에 막부에 출생이 신고된 아이는 정실 쥬쇼인 소생의 적남 요리미네 뿐이었기 때문에, 요리히사는 전 번주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는 이를 나가아리의 장녀 타메히메와 일문인 사가라 요리나오의 아들로 해서 양자로 맞이했다고 한다. 공적 계보인 『寛政重修諸家譜』에는 요리미네의 조카로, 가문 자료 『探源記』와 『相良家譜』에는 요리미네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호레키 8년 (1758년)에 요리미네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양자가 되어 가독을 이었다. 호레키 9년 (1759년) 6월부터 히토요시에 들어가 번정을 잡았는데, 같은 해 윤7월 15일에 사츠마세 저택 (현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 시모사츠마세쵸 부근) 관란정에서 휴양하던 중, 누군가의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고,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1개월 후인 8월 3일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총성이 들렸으니, 암살이나 다름없다며 히토요시번 일각에서는 배후관계 조사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번 상층부는 들린 소리는 어린이가 놀던 대나무 총 (폭죽)으로 결론짓고 그의 사인을 병사로 처리했다. 고로, 이 암살사건은 대나무총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실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부터 이 암살의 배경에는 전 번주 시절부터 대립해온 사가라씨 일문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후, 급히 쥬쇼인의 동생인 휴가 타카나베번 번주 아키즈키 타네미츠의 3남 미츠나가를 사후 양자로 맞이해 가독을 잇게 했다. 이로써 히토요시번개역은 피할 수 있었지만, 사가라가의 혈통은 단절, 이후 히토요시번에서는 10년간 4명의 번주를 차례로 다른 집안에서 맞이하는 혼란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가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