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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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행선(睦行善, 1609년1661년)은 조선의 문신, 정치인이다. 자는 행지(行之), 호는 남간,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성균전적과 예조좌랑·사헌부의 지평· 홍문관의 수찬·대사성, 예조·호조·병조참의·대사간·승지, 황해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생애[편집]

목장흠(睦長欽)의 아들로 태어났고, 작은 아버지인 공조참의 목대흠(睦大欽)의 양자가 되었다.

1630년(조선 인조 8년)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 11년) 식년문과의 전시(殿試)에 갑과(甲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 겸 기사관(禮曹佐郞兼記事官)·지제교(知製敎)로 국사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병조좌랑을 거쳐, 경기도도사로 병자호란에 공을 세웠다. 1637년(조선 인조 15년) 사헌부지평 재직 중 지사(知事) 김시양(金時讓)의 상소문에 지적당했다는 이유로 옥당에서 사헌부 관원들의 인피를 청하자 인조가 받아들여 면직되었다.[1] 그해에 도로 복직했으나 병으로 그해 6월 지평에서 사직했다가 그해 12월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1638년(조선 인조 16년) 1월 5일 이시백을 병조판서로, 구굉(具宏)을 공조 판서로, 윤명은(尹鳴殷)을 부교리로, 목행선(睦行善)을 수찬으로 임명했다.[2] 1645년 호남 어사(湖南御史)로 파견되었다.[3]

1649년(인조 27년) 3월 20일 우의정 정태화·부사 우윤 김여옥·서장관과 함께 응교로서 청나라에 사은사로 갔다.[4]

1652년 대사간으로 임명되었고,[5] 1653년(효종 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656(효종 7년) 다시 상주목사가 되었다. 1658년 내직으로 돌아와 호군이 되었다.

1658년(효종 9년) 민응협(閔應協)이 대사헌으로, 목행선(睦行善)이 이조참의로, 송시열이 찬선으로 임명되었다.[6]

1659년(효종 10년) 예조참의로 의병 사퇴한 후, 1660년 4월 16일 호군에 임명되었다. 군직에 있다가 현종(1661)에 졸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지행리(현, 경기도 동두천시 지행동 산 2번지)에 있다.[7]

가족 관계[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각주[편집]

  1.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윤4월 29일 정묘 2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2. 인조실록 36권, 16년(1638 무인 / 명 숭정(崇禎) 11년) 1월 5일(기사) 2번째기사
  3.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2월 27일 경진 1번째기사
  4. 인조실록 50권, 27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3월 20일(기묘) 1번째기사
  5. 효종실록 9권,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7월 8일(정축) 2번째기사
  6. 효종실록 20권, 9년(1658 무술 / 청 순치(順治) 15년) 7월 13일(무신) 2번째기사
  7. 동두천시, 동두천시 30년사 Archived 2015년 4월 16일 - 웨이백 머신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