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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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립도서관에 소장된 류큐국 회도. 중요문화재 지정.

마지리(マジリ[1])는 류큐왕국 시대 오키나와아마미 군도의 행정구역 구분이다. 한자로는 간절(間切)이라고 쓴다. 행정구역이자 그 자체로 직접납세의무를 가지는 일종의 법인격이기도 했다.[2]

삼산시대의 지세도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 이전의 류큐의 행정구역 구분은 고고학적 고찰에 근거하고 있다.[3] 제2쇼씨 왕조 3대 왕인 쇼신왕 때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왕도인 슈리나하를 제외한 지방에 마지리와 시마(シマ)의 제도가 성립되었다.[4] “시마”는 중세 구스쿠 시대에 성립된 공동체를 하나 또는 복수로 묶어 행정단위로 삼은 것으로, 근세에 무라(村)가 되었다.[4]

17세기에 류큐를 침공해 예속시킨 사츠마번은 류큐로부터 공납을 뜯기 위해 류큐에도 일본의 석고제를 도입시켰다. 이에 따라 검지가 이루어지고 토지대장과 향촌 일람, 지도가 정비되었다. 이로써 고지명의 지정적 위치가 처음으로 명료해졌다.[5] 근세의 마지리에는 마지리를 영(領)하는 안사지두(按司地頭)와 총지두(総地頭)가 있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양총지두(両総地頭)라고 했다.[4][6] 인사지두와 총지두는 동일한 마지리에 중복발령되었다.[2] 또한 이와 별도로 무라를 영하는 협지두(脇地頭)가 있었다.[6] 협지두의 영지와 양총지두의 영지는 무라로서 중복되어 영지병급(領地併給)으로 되었다.[2]

1879년(메이지 12년) 류큐처분으로 오키나와현이 설치된 이후에도 슈리와 나하를 제외한 지방에서는 지방자치제도로서 마지리가 잔존하다가,[7] 1907년(메이지 40년) 칙령 제46호로 오키나와현 및 도서정촌제가 발령되면서 이듬해인 1908년 마지리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 때 기존의 마지리가 촌(손)이 되고, 무라는 아자(字)가 되었다.[4]

각주[편집]

  1. “語彙詳細 — 首里・那覇方言”. 《ryukyu-lang.lib.u-ryukyu.ac.jp》.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3월 14일에 확인함. 
  2. 中江淳一 (1974). “明治前期沖縄封建農業の構成”. 《土地制度史学》 (政治経済学・経済史学会) 16 (3): 43–53.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 (도움말)
  3. “予備知識 - 沖縄県立図書館 貴重資料デジタル書庫”. 《www.library.pref.okinawa.jp》. 2020년 11월 15일에 확인함. 
  4. 大宜味村教育委員会. “大宜味村文化財基礎調査及び歴史文化基本方針策定事業報告書” (PDF). 文化庁.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5. 田名真之『南島地名考: ─おもろから沖縄市誕生まで』(2014年)、おきなわ文庫
  6. “糸満市のあゆみ”. 糸満市.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7. “沖縄県間切島制”. 琉球新報.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