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이 (코르벳)
2 히에이 (比叡) | |
---|---|
일본의 장갑코르벳 히에이
| |
대략적인 정보 | |
함명 | 히에이 (比叡) |
함종 | 코르벳 |
함번 | 2 |
제작 | 밀퍼드 헤이븐 조선소 (영국) 웨일즈 펨브로크 도크 |
운용 | 일본 제국 해군 |
발주 | 1875년 회계년도 |
기공 | 1875년 9월 24일 |
진수 | 1877년 6월 11일 |
취역 | 1878년 2월 |
퇴역 | 1911년 4월 1일 |
최후 | 1912년 3월 25일 매각 및 해체 |
부대마크 | |
일반적인 특징 | |
함급 | 곤고형 코르벳 |
배수량 | 2,284 t |
전장 | 67.1 m |
선폭 | 12.5 m |
흘수 | 5.8 m |
추진 | 1축, 1 수평 왕복 연결 막대 증기엔진 2,450ihp 6 실린더 보일러 |
속력 | 13 노트 (시속 24 km/h) |
항속거리 | 10노트로 5700km (19km/h) |
승조원 | 234명 |
무장 | 3 × 170mm 크럽 건
6 × 150mm 크럽 건 2 × 75mm 포 |
장갑 | 벨트: 3~4.5인치 |
히에이(比叡)는 1870년대에 제작된 일본 제국 해군의 곤고형 코르벳 2번함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철골 구조의 전함을 자체 제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제작되었다. 이 함은 선체가 철골 구조에 나무를 덧대어 만들었다. 이후에 3등해방함으로 분류되었고, 1887년에 연습함으로 이용되어, 지중해와 주변 태평양의 나라들의 해역까지 연습 순항을 했다. 돌아와서는 현역함으로 1894년부터 청일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황해 해전 중 대파되었다. 이 함은 또한 웨이하이 전투, 그리고 1895년 타이완 침공에도 투입되었다. 전후 다시 연습함으로 임무를 시작하다가 1904년 러일 전쟁에서는 사소한 업무를 처리하는데 투입되었다. 1906년에는 측량함으로 분류되었고, 1912년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
개요
[편집]1874년 일본의 짧은 타이완 점령기 동안,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해군력을 증강할 필요를 가지게 했다. 다음 해 일본 정부는 장갑프리깃함 후소와 2대의 곤고형 함선을 주문하였다. 이후 조선 총감독이 된 에드워드 제임스 리드가 설계를 하였고[1], 영국 펨브로크의 ‘밀퍼드 헤이븐 조선소’(Milford Haven Shipbuilding & Engineering Co.)에서 기공되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그 크기의 배를 제작할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2] 1978년 일본으로 건너와 5월 22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종군한 후 측량 임무에 투입되어 일본 근해의 수로 측량 업무를 담당했다. 1911년에 퇴역하여, 이듬해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
연표
[편집]- 1878년 5월 11일 3등함 분류
- 1880년 4월 - 8월 인도, 페르시아, 동남아 순방
- 1882년 임오군란 때 조선 수역 경계
- 1889년 8월 - 1890년 2월 사관학교 생도의 지중해 방면 원양 항해를 수행 (이후 1902년 정도까지 6회 원양 항해를 수행)
- 1890년 8월 23일 제1종으로 분류
- 1890년 10월 - 1891년 5월 터키 군함 에루투루루 호 생존자 송환과 원양 항해로 요함 ‘곤고’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방문
- 1894년 - 18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하여 다롄, 뤼순, 웨이하이웨이 공략 작전 등에 투입, 황해 해전으로 대파
- 1898년 3월 21일 3등 해방함으로 분류
- 1904년 - 1905년 러일 전쟁 종군 마이즈루, 여순항 경계를 담당
- 1907년 측량 임무에 투입되어 1908년까지 관련 임무를 수행
- 1911년 4월 1일 퇴역
- 1912년 매각되어 훗날 해체
각주
[편집]외부 링크
[편집]- 니시다, 히로시. “Materials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