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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
'''얌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



2012년 5월 5일 (토) 14:01 판

얌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

1. 얌니야 시대에 대해서

레바논의 조그마한 어촌인 야브네셀레우코스 왕조 아래에서 그리스어로 얌니야라고 불리게 된다. 이 조그마한 마을이 주목받은 이유는 유대교와 기독교 두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는 산헤드린이 열렸기 때문이다.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AD 70부터 132년까지 이 조그마한 마을 얌니야는 유대교의 중심지였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파괴되면서 사두가이파열심당은 사라졌고, 마싸다 항전으로 사해 일대가 전쟁터가 되면서 그 주변에서 번성하던 에세네파 역시 전란의 참화를 피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세력은 바리사이파뿐이었고, 그들을 이끈 지도자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AD 80년 경 랍비 가말리엘 2세가 그 뒤를 이었고, 본격적인 유대교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이 조그마한 도시 얌니야에서는 여러 주목할만한 일이 이뤄지는데, 율법학원(벳 미드라쉬)과 최고회의(벳딘)가 만들어져 유대인 사회를 재결속하였다. 그리고 구전되어오던 규범들을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기록하여 규범전집(미쉬나)를 처음 출간, 미쉬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세계사에서 의미있는 얌니야 시대의 족적이라면 바로 기독교를 유대교 안에서 축출하였다는 것이다. 그 것은 회당 예배때마다 드리는 18조항의 기도문에 기독교의 신앙을 단죄하는 12조의 기독교 단죄문을 추가하고 그를 읊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회당 예배를 금지한 것과, 얌니야 회의를 통해 기독교의 경전인 70인역을 없애고 새롭게 타나크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2. 얌니야 회의

2.1 얌니야 공의회에 대한 통설

유대인 역사학자 하인리히 그래츠는, AD 90년 경 얌니야에서 열린 산헤드린에서 유대인들의 성경, 타나크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3분법에 따른 성경 구분에서 유대교 초기부터 경전성을 인정받은 토라에 더해서, 느헤미야, 혹은 대회당 시대에 느비임의 정경성이 인정을 받았으며, 크투빔에 대한 정경화는 1차 유대항쟁 직전에 있었으나 논란성이 있던 전도서와 아가서의 정경성은 얌니야 회의에서 비로소 인정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얌니야 회의에 처음으로 시노드(종교회의)라는 명칭을 붙여 구약 정경을 확정한 권위있는 기구임을 표현하였고, 기독교 학자인 프란츠 불과 라일 역시 그래츠의 주장을 재확인함으로서 얌니야 회의에서 구약성경 경전화는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2.2. 통설의 배경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사두가이파는 근거지를 잃었고, 로마에 반대하여 1차 유대항쟁을 주도한 열심당은 마싸다 항쟁을 끝으로 전멸했다. 그들의 근거지 주변이 최후의 항쟁터가 된 에세네파 역시 전쟁의 참화를 피하지 못했고, 일찌기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영도로 전쟁의 참화를 피한 바리사이파만이 고유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리사이파는 이후 유대교 내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구축한다. 다른 종파들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그들은 배타적 태도를 강화하고 자신들의 신조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회당 밖으로 축출하였고, 특히 교회의 기둥이었던 주의 동생 야고보 사도를 잃은 후 디아스포라 유대인 및 이방인들에게 교회 내 주도권을 내어주며 탈 유대-율법적 모습으로 변화하던 기독교가 그 주요 축출 대상이 되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유대교 안에서 확립하였고,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경전성을 최종적으로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얌니야 회의는 특정 유력 당파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니케아 공의회와 동일한 성격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2.3 얌니야 가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

최근의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얌니야 가설이 지나치게 단순하며, 공동체 존속에 대한 위기감을 강조하여 얌니야 공동체가 반대 목소리가 허용되지 않는 경직된 분위기였음을 전제한 것을 비판하였다. 얌니야 시대는 미쉬나의 확립에 특히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미쉬나의 경우에는 특정한 견해만이 아닌 서로 대립되는 견해도 배척하지 않고서 나란히 배열하고 있는다. 이는 그 전의 유대교 문서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으로서 얌니야 공동체가 성전 파괴 이전에 몇몇 주요 종파를 제외한 이단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던(예수 수난이나 사도들의 순교) 내부 경직성을 벗어나서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 일부 학자들은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얌니야 회의를 공의회가 아닌, 학당(베이트 미드라쉬)라든지, 랍비학교(예쉬바)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AD 4세기까지 일부 타나크 문서의 경전성에 대한 내부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점 등을 그 예로 들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얌니야 회의 이후에 기독교가 유대교와 본격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요인

기독교 책들이 나오는 것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들이 경전의 마감을 서두름. 반면에 묵시 경향을 띤 유대교 분파와 바리새 파 간에 벌어진 논쟁이 직접적인 동인이었다는 의견도 있음.

성경의 원류에 해당하는 유대인의 성경 타나크는 대략 B.C. 1500~400년대 사이에 오랜 세월을 거쳐 바벨론, 블레셋,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 낱권들로 기록된 경전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본 얌니아 회의를 통해 현재의 분류과 확립되었다는 전승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