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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成漢)의 '''이웅'''은 오호십육국 시대 티베트계 저족의 일파였던 파저족으로 성한을 건국하였다.
[[성한]](成漢)의 '''이웅'''은 오호십육국 시대 티베트계 저족의 일파였던 파저족으로 성한을 건국하였다.


298년 이웅의 아버지 [[이특]](이모(李慕)의 아들)이 천수(天水) 등 6군(郡)의 유민들을 이끌고 촉에 들어왔다.
298년 이웅의 아버지 [[이특 (성한)|이특]](이모(李慕)의 아들)이 천수(天水) 등 6군(郡)의 유민들을 이끌고 촉에 들어왔다.


이웅은 성도왕(成都王)(재위303년 - 304년)을 자칭하다. 이웅은 사천을 장악하고, 황제라 칭하여 국호를 성이라고 하였다.
이웅은 성도왕(成都王)(재위303년 - 304년)을 자칭하다. 이웅은 사천을 장악하고, 황제라 칭하여 국호를 성이라고 하였다.
무제(武帝)이웅(李雄,재위304년 - 334년)은 「성」(혹은 성촉)의 황제라고 칭했다
무제(武帝)이웅(李雄,재위304년 - 334년)은 「성」(혹은 성촉)의 황제라고 칭했다


[[서진]](西晉) 후기인 영흥(永興) 3년(306년), 이웅(李雄)은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은 군사와 정치 양쪽에서 노력하여 그의 치세는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혼란스런 화북과는 별개로 별천지와 같은 번영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웅의 사후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국력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서진]](西晉) 후기인 영흥(永興) 3년(306년), 이웅(李雄)은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은 군사와 정치 양쪽에서 노력하여 그의 치세는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혼란스런 화북과는 별개로 별천지와 같은 번영을 맞이하였다.{{출처}} 하지만 이웅의 사후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국력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출처}}





2008년 9월 9일 (화) 09:20 판

성한(成漢)의 이웅은 오호십육국 시대 티베트계 저족의 일파였던 파저족으로 성한을 건국하였다.

298년 이웅의 아버지 이특(이모(李慕)의 아들)이 천수(天水) 등 6군(郡)의 유민들을 이끌고 촉에 들어왔다.

이웅은 성도왕(成都王)(재위303년 - 304년)을 자칭하다. 이웅은 사천을 장악하고, 황제라 칭하여 국호를 성이라고 하였다. 무제(武帝)이웅(李雄,재위304년 - 334년)은 「성」(혹은 성촉)의 황제라고 칭했다

서진(西晉) 후기인 영흥(永興) 3년(306년), 이웅(李雄)은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은 군사와 정치 양쪽에서 노력하여 그의 치세는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혼란스런 화북과는 별개로 별천지와 같은 번영을 맞이하였다.[출처 필요] 하지만 이웅의 사후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국력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출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