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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구단'''(秃发傉檀, 365年-415年)은 [[오호십육국]]시대 [[남량]]의 후주(재위:402年-414年)였다.
'''독발구단'''(秃发傉檀, 365年-415年)은 [[오호십육국]]시대 [[남량]]의 후주(재위:402年-414年)였다.
402년 독발이녹고(利鹿孤)가 죽은 후 독발구단이 계승하여 스스로 양왕를 칭하고 서평에서 낙도로 수도를 옮기고, 이곳을 새롭게 증축하여 왕도로써의 위용을 정비하였다.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한 옛 [[서진]]의 태자 걸복직반이 도망치자, 독발구단은 그의 처자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402년 독발이녹고(利鹿孤)가 죽은 후 독발구단이 계승하여 스스로 양왕를 칭하고 서평에서 낙도로 수도를 옮기고, 이곳을 새롭게 증축하여 왕도로써의 위용을 정비하였다.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한 옛 [[서진]]의 태자 걸복직반이 도망치자, 독발구단은 그의 처자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403년 8월 [[후량 (오호십육국)|후량]]은 연이어 수도 고장을 남량과 북량에게 공격받아 더이상 정권으로써 존재가 불가능하게 되어, 기어코 고장성을 후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하서의 세력권은 크게 변동하여 404년 구단은 자신의 연호를 폐지하고, [[후진]]의 연호를 받들어 후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403년 8월 [[후량 (오호십육국)|후량]]은 연이어 수도 고장을 남량과 북량에게 공격받아 더이상 정권으로써 존재가 불가능하게 되어, 기어코 고장성을 후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하서의 세력권은 크게 변동하여 404년 구단은 자신의 연호를 폐지하고, [[후진 (오호십육국)|후진]]의 연호를 받들어 후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한편 독발구단은 융성하던 [[북량]]을 공격해 하서 중서부로도 세력을 확장해 후진의 고장에도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후진은 고장을 유지하지 않고, 406년 6월 구단에게 사지절(使持節)-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거기대장군(車騎大将軍)-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将)-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하여 고장의 영유를 인정하였다. 11월 독발구단은 낙도에서 고장으로 천도하여 한명의 병사손실 없이 하서 동부를 세력 하에 넣었다. 또한 독발구단은 [[북량]]에 대항하던 [[서량]]과 동맹을 맺어 이로써 남량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편 독발구단은 융성하던 [[북량]]을 공격해 하서 중서부로도 세력을 확장해 후진의 고장에도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후진은 고장을 유지하지 않고, 406년 6월 구단에게 사지절(使持節)-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거기대장군(車騎大将軍)-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将)-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하여 고장의 영유를 인정하였다. 11월 독발구단은 낙도에서 고장으로 천도하여 한명의 병사손실 없이 하서 동부를 세력 하에 넣었다. 또한 독발구단은 [[북량]]에 대항하던 [[서량]]과 동맹을 맺어 이로써 남량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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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장성내에서는 북성에서 흉노계의 객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직 후 이번에는 남량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고장성내에서는 북성에서 흉노계의 객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직 후 이번에는 남량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408년 5월 [[후진]]은 [[남량]]에게 고장을 넘겨준 것을 후회하고,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구단은 고장에서 농성하여 2번에 걸쳐 후진군을 물리쳤으나, 이때 성내에서 후진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등 서서히 구심력이 저하되면서 국력의 피로를 초래했다.
408년 5월 [[후진 (오호십육국)|후진]]은 [[남량]]에게 고장을 넘겨준 것을 후회하고,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구단은 고장에서 농성하여 2번에 걸쳐 후진군을 물리쳤으나, 이때 성내에서 후진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등 서서히 구심력이 저하되면서 국력의 피로를 초래했다.


409년 독발구단은 국내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북량]] 원정에 나서, 북량의 저거씨의 출신지였던 임송군(臨松郡)까지 쳐들어가 이곳을 약탈했으나 돌아오던 도중 역습을 당해 대패했다.
409년 독발구단은 국내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북량]] 원정에 나서, 북량의 저거씨의 출신지였던 임송군(臨松郡)까지 쳐들어가 이곳을 약탈했으나 돌아오던 도중 역습을 당해 대패했다.

2008년 8월 17일 (일) 08:03 판

독발구단(秃发傉檀, 365年-415年)은 오호십육국시대 남량의 후주(재위:402年-414年)였다.

402년 독발이녹고(利鹿孤)가 죽은 후 독발구단이 계승하여 스스로 양왕를 칭하고 서평에서 낙도로 수도를 옮기고, 이곳을 새롭게 증축하여 왕도로써의 위용을 정비하였다.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한 옛 서진의 태자 걸복직반이 도망치자, 독발구단은 그의 처자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403년 8월 후량은 연이어 수도 고장을 남량과 북량에게 공격받아 더이상 정권으로써 존재가 불가능하게 되어, 기어코 고장성을 후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하서의 세력권은 크게 변동하여 404년 구단은 자신의 연호를 폐지하고, 후진의 연호를 받들어 후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한편 독발구단은 융성하던 북량을 공격해 하서 중서부로도 세력을 확장해 후진의 고장에도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후진은 고장을 유지하지 않고, 406년 6월 구단에게 사지절(使持節)-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거기대장군(車騎大将軍)-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将)-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하여 고장의 영유를 인정하였다. 11월 독발구단은 낙도에서 고장으로 천도하여 한명의 병사손실 없이 하서 동부를 세력 하에 넣었다. 또한 독발구단은 북량에 대항하던 서량과 동맹을 맺어 이로써 남량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407년 남량은 빠르게도 쇠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8월 독발구단은 황수지구, 하서지구 등 전영역에서 병사를 총동원하여 5만의 병력을 모아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량을 공격했다. 그러나 독발구단은 숫적으로 뒤지던 북량저거몽손에게 균석(均石)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역으로 일근군(日勒郡), 서군(西郡)을 잃었다. 11월 이번에는 오르도스를 석권한 하의 혁련발발이 멀리 원정하여 2만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광무군에 침입하여 대대적으로 약탈을 한뒤 철수했다. 독발구단은 하나라군을 추격하여 양무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혁련발발의 반격에 의해 전군이 괴멸하고 독발구단은 목숨만을 건져 고장으로 패주했다.

이때 고장성내에서는 북성에서 흉노계의 객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직 후 이번에는 남량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408년 5월 후진남량에게 고장을 넘겨준 것을 후회하고,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구단은 고장에서 농성하여 2번에 걸쳐 후진군을 물리쳤으나, 이때 성내에서 후진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등 서서히 구심력이 저하되면서 국력의 피로를 초래했다.

409년 독발구단은 국내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북량 원정에 나서, 북량의 저거씨의 출신지였던 임송군(臨松郡)까지 쳐들어가 이곳을 약탈했으나 돌아오던 도중 역습을 당해 대패했다.

410년 정월 독발구단은 다시 북량을 공격했다가 패하고 3월 기병 5만을 이끌고 북량군과 궁천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이마저도 대패해, 오히려 북량군이 공세에 나서 수도 고장을 포위당했다. 고장성안은 큰 혼란에 빠져 묵굴부, 맥전부, 거개부등의 하서 선비의 원종이 차례로 배신하고 북량군에 항복했다. 구단은 항전을 포기하고 일족인 독발경귀(禿髪敬帰)와 아들 독발지(禿髪他)를 인질로 내놓고 북량군과 강화했다.

그해 남량의 황수지구에서 절굴기진(折堀奇鎮)이 반란을 일으켜 남량의 토벌군은 이들에게 대패했다. 구단은 북량의 압박과 황하(湟河)유역의 상실을 두려워해 곧이어 고장에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구단이 고장을 떠난 직후, 초랑(焦朗)이 고장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를 자칭했다. 이로써 남량의 하서지역의 거점이던 고장은 판도에서 떨어져 나가고, 남량의 하서진출도 좌절되게 되었다.

411년에 들어서 남량을 둘러싼 정세는 시시각각 악화되어 갔다. 1월 북량은 고장을 공격해 함락시켜 하서를 통일하고 그대로 남하하여 수도 낙도를 포위했다. 이 기회를 틈타 남쪽에서는 토번이 요하군(澆河郡;현재의 청해성 귀덕현)을 공격해 빼앗았다. 또 동쪽에서는 409년 재흥한 서진이 그해 걸복직반을 대장으로 남량에 공격해 들어와 홍지영남(洪池嶺南)지방을 약탈했다. 2월 독발구단은 아들 독발안주(禿髪安周)를 인질로 보내 북량군을 물러가게 하고, 역으로 군대를 다섯 길로 나눠 북량에 침공해 들어갔다. 그러나 독발구단은 북량군에게 대패하고 그대로 다시 낙도를 포위 당했다. 독발구단은 아들 독발염간(禿髪染干)을 인질로 내보내 북량군을 퇴각시켰다. 이때 남량의 약세는 두드러져서 겨우 황하유역의 5군(서평, 낙도, 황하, 진흥, 광무)의 땅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413년 독발구단은 2번에 걸쳐 북량에 공격했으나 약후 와 약량에서 또 대패하고 황하군을 잃고 수도 낙도를 포위 당했다. 독발구단은 이번에도 공격을 견디고, 동생 독발구연을 인질로 내보내 북량군을 퇴각시켰다.

414년 4월 독발구단은 붕괴일보직전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에 배반했던 청해호 부근의 결간부, 을불부에 대해 직접 기병 7천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이 기회를 틈타 서진의 걸복직반이 낙도에 공격해 들어와 역으로 남량의 수도 낙도는 함락되었다. 남량 지배하의 3군도 모두 서진에게 항복하여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원정군도 6월에 서진에 항복했다. 이로써 남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해 독발구단은 독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