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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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집 유 庾 ==
== 곳집 유 庾 ==
=== 한국 ===
중국의 '유'(庾, Yu)씨는 [[초나라]] 관직에서 나온 성씨라고 전한다. 관직에서 나온 성이므로 호족 성씨이며, [[저장 성]]과 [[장쑤 성]]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씨이다.

'''유'''(庾)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6,80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3위이다. 본관은 [[평산 유씨|평산]], [[무송 유씨|무송]] 2본이다.
'''유'''(庾)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6,80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3위이다. 본관은 [[평산 유씨|평산]], [[무송 유씨|무송]] 2본이다.


'''[[평산 유씨]]'''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은 평주(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에 봉해졌다. [[유금필]]의 5세손 유녹숭(庾祿崇)이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자 [[평산 유씨]]에서 분적하였다.
'''[[평산 유씨]]'''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은 평주(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에 봉해졌다. [[유금필]]의 5세손 유녹숭(庾祿崇)이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자 [[무송 유씨]] 분적하였다. 고려시대 명성을 떨쳤으나,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 중국 ===
중국의 '유'(庾, Yu)씨는 [[초나라]] 관직에서 나온 성씨라고 전한다. 관직에서 나온 성이므로 호족 성씨이며, [[저장 성]]과 [[장쑤 성]]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씨이다.


== 기타 유씨 ==
== 기타 유씨 ==

2014년 11월 10일 (월) 12:37 판

(柳, 劉) 또는 (兪, 庾)씨는 중국 및 한국의 성씨이다.

개요

류/유(柳)씨, 류/유(劉)씨, 유(兪), 유(庾)씨는 시조와 연원이 다른 전혀 다른 성씨이다.

류(柳)씨는 단일 계통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류씨는 신라시대부터 류씨를 사용한 전주 류씨신라-고려 전환기에 류씨로 창성한 문화 류씨, 고려말 류절을 시조로 하는 풍산 류씨와 기타 본관으로 구분된다.

류(柳)씨는 공문서에서는 두음법칙에 따라 ‘유’로 표기해 왔으나,[1] 2007년 8월 1일부터 ‘류’로도 쓸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2][3] 그리고 유(劉)씨도 본음이 柳와 같은 '류'다.[4] 곧, 두음법칙에 따라 유(劉)씨도 한글 '류' 대신 '유'로 쓰는 것이다. 柳 혹은 劉씨를 두음법칙에 따라 한글 '유'로 강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두음법칙에 따라 본인이 원해 '유'로 쓰는 柳씨들을 한글 '류'로 쓰라고 강제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

버들 류(유) 柳

한국

한국의 류/유(柳)씨는 2000년 기준 603,084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9위이다. 유 혹은 류로 표기되는 성씨 중에는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전통사회에서 가장 번성한 성씨다. 현재 문화 유씨 측에 의하면, 한국의 유(柳)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와 같이 신라말 고려초에 성씨를 창성한 것이라고 한다. 황해도 토착인 "차달"이 본래 성씨가 없다가 신라-고려 전환기에 유(柳)씨로 창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여러 본관의 柳씨는 문화 류씨를 대종으로 한 분적종도 있고 그렇지 않는 본관도 있다. 한편 조선 초기 기록인 <世宗實錄地理志 文化縣> 편에는 문화 유(柳)씨는 내성(來姓)이라고 되어 있어, 한국의 柳씨의 대종인 문화 유씨가 중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5] 이유는 <世宗實錄地理志>가 조선 초기 세종 기록인 것을 상기했을 때, 기본적으로 모화사상이 극대화된 조선후기 기록도 아니고, 객관성을 최우선으로 한 세종의 노력이 투영된 결과물이기에, 문화유씨 선계가 중국이나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유차달이 생존하였던 고려 초기 당시, 문화(유주) 주변인 정주나 다른 지역에 柳씨들이 많이 살았음을 상기했을 때, 정황상으로 봤을때는 중국보다는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주 류씨, 고흥 류씨, 풍산 류씨, 진주 류씨, 서산 류씨는 본래 문화 류씨의 분파 파조와 그렇지 않은 파조가 있는데, 정확한 연원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견이 많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고흥 유씨를 제외하고는 다른 본관의 유(柳)씨는 대종 문화 류씨에서 분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6]

중국

중국의 '류'(柳, Liu)씨는 크게 4가지 부류가 있다. 주(周)나라 제후국이자 주나라 왕족이 세운 노(魯)나라 계열과 초한쟁패기의 서초(西楚) 계열의 유(柳)씨, 중국 후한시기 고대 운남 애뢰국(哀牢國)의 유(柳)씨들, 그리고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陳)나라 군주 중 한명인 회공(懷公) 류(柳)의 자손들 등등이다. 그 중 주요 원류 두가지를 먼저 설명하자면, 첫 번째는 노나라 공족(公族)인 유하혜(柳下惠)가 유하에 살면서 후손들이 유(柳)씨로 창성하였고, 두 번째는 서초 황제 의제(義帝)가 유(柳; 현재의 후난 성 창더) 땅에 거주하여 후손들이 류(柳)씨로 창성하였다.[7] 이 중 두 번째인 의제 계열 유(柳)씨에 대해 설명하자면, 사마천의 <史記 項雨本紀>에 의하면 본래 의제(義帝)는 살아생전 우이(盱台), 팽성(彭城)에 도읍하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우에 의해 침(郴: 현재 후난 친저우)으로 쫓겨가는 중에 항우의 명을 받은 영포의 장수 등에 의해 시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유(柳:현재 후난 창더)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인용한 <義陵紀>에 의하면 유(柳)땅 사람들이 의제가 침현에 이르러 시해되자, 류(柳)땅 사람들이 어찌 '우리 왕(吾王)'을 죽였는가 하며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고조 유방이 이를 듣고 옳게 여겨 유(柳)땅을 의릉현(義陵縣)으로 하였고 훗날 서한(西漢) 초에 다시 무릉현(武陵縣)으로 고쳐진다고 하였다.(劉禹錫《武陵書懷五十韻》序稱:“常林《義陵記》雲:初,項籍殺義帝于郴,武陵人曰:‘天下憐楚而興,今吾王何罪乃見殺?’郡民缟素哭于招屈亭。高祖聞而義之,故亦曰義陵。”)[8] 이런 측면에서 봤을때, 유성(柳城) 곧, 의릉, 무릉은 의제와 직, 간접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이 확실하고 의제가 최소한 침현으로 가기 위해 이 유(柳)땅에 꽤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당시는 선조의 거주지나 선조와 관련이 있는 지명을 씨(氏)로 하는 것이 자명한 바,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의 후손들이 유(柳)씨로 칭했다는 것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오대에서 송대에 걸쳐 만들어진 <百家姓>에 현재 원류를 밝혀 나오는 거의 모든 중국 서적에서 이 의제 계열 유(柳)씨도 주요 유씨 근원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송대(宋代) 장정(章定)이 편찬한 《名賢氏族言行類稿》에도 이 의제 계열 유(柳)씨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참고로 서초(西楚)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와는 다르게 오, 월이 기반을 두었던 저장성에서 기원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유(柳)씨는 이 두 부류 이외에 소수민족의 성씨로도 존재한다. 곧, 중국 후한(後漢)시기, 운남성에 위치한 애뢰국(哀牢國) 말기의 황제들인 유승(柳承), 유모(柳貌) 부자는 모두 유(柳)씨였다.[9] [10] [11] 네 번째는 <姓纂>이라는 책에 보면 춘추전국시대 진(陳)나라 군주인 회공(懷公) 류(柳)의 자손들이 선조의 이름을 성으로 삼아 이어졌다고도 되어 있다.

묘금도 류(유) 劉

한국

한국의 '류/유'(劉, 刘)씨는 2000년 기준 242,889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순위는 32위이다. 한나라 왕자들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한반도로 도망치는 사례가 있었으며, 유헌(劉憲)은 낙랑 지역 태수을 지냈다. 서기 120년경 유헌(劉憲)은 낙랑태수였는데 왕조에게 피살된 기록이 전한다. 유인원(劉仁願)와 유인궤(劉仁軌)는 당나라 나당연합군의 무장으로 참가했다. 현재 한국 유(류:劉)씨의 주류는 강릉, 거창유씨, 시조는 유전(劉筌)인데, 송나라 병부상서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확한 고증은 아니다. 황해도 호족 가운데 유(류:劉)씨가 있었다고 전하며, 고려 왕건의 태후 신명순성왕후의 성은 유씨(류:劉氏), 본관은 충주(忠州)로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유긍달(劉兢達)의 선조는 전하지 않으나, 왕건과의 교우 관계 등의 요소 때문에 한반도 토착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현재 한국 유(劉)씨의 대종인 거창 유씨나, 고려 때 왕후를 많이 배출한 충주 유씨는 모두 토성(土姓) 곧, 한반도 토착계로 나와 있다. 이런 저런 연후로 봤을 때 한국 유(劉)씨는 대부분이 한반도 토착계로 보인다.[12] 류/유(劉)씨 역시 본음이 '류'이나 두음법칙에 따라 '유'로 쓴다.[13]

중국

중국의 '류'(劉, 刘 : Liu, Lau, Lao)씨는 6~7가지 계통이 있다. 주나라 이후 정(鄭)나라에서 류(劉)씨가 파생되었다. 한고조 유방과 어머니 유오(劉媼)도 류씨로, 남부 초나라 영토였던 저장성 출신이다. 그리고 요족들이 Liu, Lao 라는 성을 쓰고 있다. 또한 강소성 호족 항전이 유방에게 투항하고 류(劉)씨로 개칭하였다. 삼국시대 유봉은 본래 구(寇)씨였다. 흉노 어부라의 자손이 유(류:劉)씨로 변경하였다. 북위 선비족 출신의 독고(獨孤)씨가 유씨로 변경하였다. 몽골족들도 비교적 간단한 성씨인 류(Liu, Yu)씨를 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범용성씨 중 하나이다.

그러할 유 兪

한국

한국의 '유'(兪)씨는 2000년 기준 178,209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35위이다.

  • 기계 유씨(杞溪 兪氏)의 시조는 신라 6관등 아찬을 지낸 유삼재(兪三宰)이다.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 멸망 후 고려 왕조에 불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이 그를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으로 강등시킨 이후로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기계 유씨고려시대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나,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89명을 배출하였다. 인구는 2000년 기준 113,430명이다.

중국

중국에는 '유'(兪, Yu, Liu, Shu)씨가 10가지 정도 계통이 있다. 베이징 방언은 'Yu'이나, 'Liu'로 표기하기도 한다. 고대에 유(兪)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주나라 중엽에 유씨로 창성하였다. 정나라, 위나라, 초나라, 공족이 유(兪)씨로 창성하였고, 그 외 금이, 회, 만족, 토가족, 지금은 사라진 유족이 사용한 성씨다.

곳집 유 庾

한국

(庾)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6,80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3위이다. 본관은 평산, 무송 2본이다.

평산 유씨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은 평주(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에 봉해졌다. 유금필의 5세손 유녹숭(庾祿崇)이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자 무송 유씨로 분적하였다. 고려시대 명성을 떨쳤으나,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중국

중국의 '유'(庾, Yu)씨는 초나라 관직에서 나온 성씨라고 전한다. 관직에서 나온 성이므로 호족 성씨이며, 저장 성장쑤 성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씨이다.

기타 유씨

몽골족에도 류, 유(兪), 유(庾)씨가 있고, 류, 유로 발음되는 留, 유로 발음되는 由, 余, 餘, 尉, 娛, 娱 등 20여개의 성씨 가운데도 몽골족이 있다. 余, 餘는 한국에서는 여지만, 중국에서는 유, 유어다. 기원전 2500년전 몽골족의 조상 가운데 하나였던 서융족이 중국에 남하하여 유씨가 되었고, 진나라 때 서융족 유여(由余, 여여)가 귀화했다가 다른 유(여)씨로 바꾸었다. 고대 한반도 북방에는 동호라는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이 후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중국에는 유로 발음되는 성씨가 20여개 넘는다. 그 가운데 정확하게 Liu로 발음되는 성씨는 3~4가지, 20여 계통이 있는데 일부는 계통이 중복된다. 모두 합하면 주나라, 초나라, 요족 계통이 가장 많다. 유씨와 여씨는 같지는 않지만, 여는 중국에서 "유어"로 발음하기 때문에 영문으로 Yu로 표기한다. 중국, 몽골에서 유, 여는 흔한 성으로 동아시아 여러 민족, 국가에서 쉽게 발견된다. 려(呂, 余, 餘)의 광둥어는 류, 루이, 이다. 광둥어가 고대 중국의 발음 체계에 가깝다.

한국은 고려 이전 까지도 성이 없던 사람이 많았으며, 고려 초기 왕건 휘하의 장수 가운데 성을 바꾼 경우가 있다. 유는 비교적 간단한 성으로 문화 류씨을 비롯하여 한국 토착인이 존재한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선조을 모르는 경우 중국 인명 출자을 검증없이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이 오류라는 점이 몇몇 성본에서 나타났다. 유(柳, 兪, 庾)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서 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개별 토착인들이 흔히 사용되는 성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