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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장치기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퍼져서 행해졌던 오늘날의 필드하키나 골프와 비슷한 놀이로서 양편의 사람들이 각각 공채를 가지고 장치기공을 쳐서 상대편의 구문(毬門)에 넣어 승부를 다투는 공치기놀이로 직장, 딴장, 돌장 등의 경기 방식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봉희, 공치기, 타구놀이, 타격구 ,격구, 공치기, 짱치기, 얼레공치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나 장치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장치기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퍼져서 행해졌던 오늘날의 필드하키나 골프와 비슷한 놀이로서 양편의 사람들이 각각 공채를 가지고 장치기공을 쳐서 상대편의 구문(毬門)에 넣어 승부를 다투는 공치기놀이로 직장, 딴장, 돌장 등의 경기 방식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봉희, 공치기, 타구놀이, 타격구 ,격구, 공치기, 짱치기, 얼레공치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나 장치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2013년 12월 16일 (월) 14:52 판

정의

장치기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퍼져서 행해졌던 오늘날의 필드하키나 골프와 비슷한 놀이로서 양편의 사람들이 각각 공채를 가지고 장치기공을 쳐서 상대편의 구문(毬門)에 넣어 승부를 다투는 공치기놀이로 직장, 딴장, 돌장 등의 경기 방식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봉희, 공치기, 타구놀이, 타격구 ,격구, 공치기, 짱치기, 얼레공치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나 장치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시기

주로 음력 정초나 농한기에 10대~ 20대의 청소년들을 위주로 이루어진다.

놀이방법

장치기는 공을 경기장 끝선을 통과시켜 점수를 내는 방식과 구문(골문)을 만들어 그 안에 넣는 방식이 있는데 전자가 더 일반적이다.

놀이인원

6-12명을 두팀으로 나누어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많은 경우 30-40명까지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놀이시작

편을 나누는데 마을끼리 할 경우 윗마을·아랫마을 또는 동부·서부로 나누어 하고, 같은 마을끼리 할 경우 장치게를 모두 모아 섞은 다음 반으로 나눠 장치게 임자가 집어들면 그것이 편이 되기도 한다. 그밖에 가위바위보로 편을 짜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나눈다. 놀이 시작은 각 편의 대장이 나와서 한다. (ㄱ) 던질장 ― 심판이 양편 대장들의 장치게를 던지면 양편 대장들은 달려가서 장치게를 먼저 들고 돌아오는 대장이 공을 상대방 진영으로 쳐내면서 시작한다. (ㄴ) 십장 ― 중앙선에 파놓은 구멍에서 심판은 장치게 위로 공을 던져 올리는데, 이 때대장이 떨어지는 공을 친다. 나머지 공격수들은 상대편 대장이 떨어지는 공을 못 치도록 상대편 대장의 장치게를 칠 수 있다. 어느 편이든 대장의 장치게에 공이 닿으면 놀이가 시작된다. (ㄷ) 천장(웃짱) ― 중앙에 양편 대장들만이 나와서 장치게를 높이 치켜들면, 그 위로 심판이 공을 올리고 떨어지는 공을 먼저 상대진영으로 쳐내면 놀이가 시작된다. (ㄹ) 땅장(아랫짱) ― 중앙에 양편 대장들만이 나오고 중앙에 파놓은 구멍 안의 공을 심판의 호각소리에 맞춰 먼저 상대진영으로 쳐낸다. (ㅁ) 돌림장(소래기) ― 중앙에 양편 대장들만이 나와서, 심판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또는 몇 바퀴를 돈 다음, 구멍 안에 있는 공을 먼저 쳐내면 시작된다.

놀이규칙

절대로 손과 발을 공에 대서는 안되며 반드시 장치게로만 공을 쳐야 한다. 상대편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밀거나 장치게로 상대편 종아리 같은 곳을 치면 반칙이다. 또 장치게가 머리 위까지 올라가면 반칙이 되나 고의가 아니면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심하게 때리거나 고의적으로 손이나 발을 대면 반칙이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경기장 밖으로 퇴장시키기도 한다.

점수내기

상대편의 정해진 선 밖으로 나가면 점수를 1점 얻는다. 즉 직사각형의 짧은 면이 정해진 선이고 선 밖으로 쳐서 밀어내면 1점을 얻는 것이다. 한 골을 넣게 되면 '한 판 이겼다.'라고 하고 땅에다 기록해둔다.

승부내기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했고, 짬짬이 식사를 하기 위해 쉬었다가 계속했다. 따라서 정해진 점수가 없다. 그러나 5점 내기 또는 10점 내기를 정해서 먼저 그 점수에 도달하는 편이 이기게 된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놀이용구

장치게(장작대기·장치기 막대), 장부랄(나무로 깎은 납작한 장치기공), 던지게가 필요한데, 보통 아래와 같다.

장치게(짝지·공채)

장작대기 또는 장치기 막대라고도 하는데, 소나무·호두나무·삼나무·참나무·노간주나무 등의 나뭇가지를 재료로 한다. 손잡이의 길이는 1m 10cm, 굵기는 8cm 정도이며, 장치게 발(장시)의 길이는 10~15cm로 손잡이에서 발은 거의 'ㄱ'자 형태로 꺾어진 것으로 만든다.

장부랄(장치기공·짱공)

장부랄은 나무로 깎은 납작하거나 둥근 공인데, 길이는 5~6cm이고 굵기도 5~6cm 정도이다. 보통 탱자크기만 하고 귤보다는 작다. 장부랄은 동네 목수가 만들어주기도 하였는데, 팔각형으로 깎은 것도 있다. 장부랄의 재료로는 복숭아나무가 단단해서 많이 사용되고, 삼나무나 참나무, 소나무 옹이 있는 부분을 사용하기도 했다. 잃어버릴 것에 대비하여 두 개 정도 더 준비한다.

던지게

장치게 발에 나뭇가지를 하나 남겨서 그것을 장치게 발끝에 철사로 동여매어 오목한 홈이 생기게 하고, 그 홈 밑면을 철사나 삼 껍데기로 망을 만들어 장부랄이 빠져나가지 않고 걸리게 하는 도구이다. 맨 뒤에 있는 한 사람만 '던지게'를 사용하는데, '던지게'가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굴러오는 장부랄을 걷어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반칙과 벌칙

반칙

① 공이 몸의 일부에 닿는 것, ② 상대편의 공채를 몸으로 막는 행위, ③ 상대편의 몸을 공채로 치거나 치려고 하는 행위, ④ 상대편의 경기 활동을 몸으로 막는 행위, ⑤ 공을 구장의 종선 밖으로 쳐내는 것, ⑥ 공을 횡선 밖으로 쳐내는 것 등이다.

벌칙

①, ②, ③, ④를 반칙한 경우 심판은 상대편에게 ‘물레공’을 치게 한다. ‘물레공’이란 몸을 한 바퀴 돌면서 공을 치는 것을 말한다. ⑤의 반칙을 하였을 때는 굴려주는 ‘굴러공’을 치게 한다. ⑥의 반칙을 하였을 때는 상대편에게 ‘구멍공’을 치게 한다. ‘구멍공’은 공을 원의 중심에 파놓은 구멍에 놓고 치는 것이다. 심판은 ‘딱딱이’를 쳐서 경적을 삼고, 상대편을 식별하기 위하여 너비가 있는 청홍(靑紅)의 색띠를 두른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래

장치기란 이름은 이 놀이가 서민 놀이화되면서 불리어진 것으로 막대기“장”과 친다의 명사 “치기”가 붙어서 장치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현재 장치기는 경남의 밀양, 거창, 의령, 산청, 동래 등과 경상북도의 영주, 김천, 안동, 경산 등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장치기의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장치기는 기마격구인 격구를 간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 무인석상에서 장치기 채를 들고 서 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장치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권1 태조 원년(918년) 9월 갑오조>>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으며 고려 이전의 삼국시대에도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 어린이민속박물관 격구가 고려시대 이후 성행한 것으로 미루어 장치기도 크게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격구가 조선 세종(世宗) 때 무과시험에 채택되면서 이를 연마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땅 위에서 행하는 장치기가 성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18세기 중반 격구가 무과의 과목에서 빠지면서 민간에서 이 장치기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우리 경기부흥의 봉화, 장구 얼레공대회 개최’라는 제목 아래 장치기대회가 개최됨으로써 장치기의 명맥이 부활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각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행해지다가 1970년 경남 밀양문화원 무안분원이 발족할 당시 촌로들의 회상을 종합하여 장치기대회를 열어 경축함으로써,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장치기가 오늘날까지 전승·보존되고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장치기의 유래는 고려 말, 조선 초, 조선 후기로 다양하게 나뉜다. 실제 이 놀이가 유행한 시기는 조선 후기이지만, 단편적인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도 장치기의 형태가 나타난다. 조선 초기에 장치기의 초기 형태인 지상격구는 놀이 방식이 크게 2가지로 나타난다. 공을 쳐서 와아라는 구멍에 넣는 구멍투입형, 일정한 과녁을 맞히는 과녁타격형이 있다. 공을 앞에 놓고 막대로 타격해서 일정한 목표물에 넣거나 맞추는 방식으로 보아 위의 2가지 기록의 지상격구는 장치기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근대적 장치기의 형성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대략 마상격구가 소멸된 조선 후기에 민간에 보급되었으며, 19c에는 널리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 <장치기의 전승과 변모 양상>/정형호

의의

과거 장치기놀이는 무관시험과목으로도 적용되었었는데 이러한 장치기를 하므로써 용감성과 투지, 민첩성을 키울 뿐 아니라 체육운동기능을 높일 수 있었으며 몸을 튼튼히 하고 집단주의정신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지역사례

전국대회로 연 전조선 얼레공대회

1931년 2월 1일 서탄면 황구지천에는 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을까? 당시를 살다간 어르신들의 증언으로는 눈이 발목까지 쌓였는데, 용소리 앞 냇가는 온통 까맣다고 하였다. 당시는 일제치하에서 흰옷을 못 입게 하였기 때문에, 검은 물감을 들인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31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우리 경기 부흥의 봉화라는 제목으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 사보 1월 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이라고 하였다. 즉 처음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열기로 한 ‘전조선 얼레공대회’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는 바람에 서탄면 황구지천으로 옮겨서 경기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장치기' 또는 '얼레공치기', '짱치기' ‘장구’ ‘봉희’ 등으로 부른 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193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연희가 되어왔던 놀이니, 중단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장치기를 시합으로 할 때는 '장치기'라 하고, 놀이로 할 때는 '장채놀이'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장이라는 채를 갖고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짚으로 만든 공을 ‘얼레공’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얼레공치기라’고도 불렀다. 장치기는 놀이방법이나, 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기구 등이 간단하다. 놀이를 하기 위해선 짚이나 나무공이를 이용해 만든 '공'과, '장'이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채만 있으면 된다. 공은 짚을 엮어서 만드는 방법을 택했으며, 장은 물푸레나무 등을 이용해 길이가 3~4 자 정도에, 끝이 45도 앞으로 휘어져 10~15cm 정도 되는 것을 사용한다. 장치기는 1950년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놀이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넓은 논바닥에서 마을끼리 대항을 하기도 했단다. 장치기 놀이에는 특별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몇 명이라도 모이면 편을 갈라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장치기가 꼭 놀이로서만 전승되어 온 것은 아니다. 장치기는 겨울에 운동량이 부족할 때, 몸을 움직여 원활한 신진대사를 돕기 위해 하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또 일부 마을에서는 얼레공을 자신의 마을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을로 복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얼레공을 짚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풍농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장치기의 언제부터 민속놀이로 전해졌을까? 장치기의 시원은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격구'로 본다. 「고려태조 원년 9월 갑오에 상주의 적사 아자개가 사자를 보내어 귀순하려 하매, 왕이 명하여 그를 맞이하는 의식을 구정(毬庭)에서 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 1년인 937년 기록에 격구장이 있었다는 것은, 격구는 그 이전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면서 하는 마상격구를 할 때, 그 치장의 화려함이 지나쳐 한 때 금지시키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조와 정종이 격구를 즐겼으며, 세종 7년인 1425년엔 무예연습의 필수과목으로 격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세종 때는 봉희(=장치기)를 하느라 경신일에 밤을 새우기도 하였는데, 경신일이란 섣달 그믐을 말하는 것이다. 즉 밤을 새워 장치기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조 역시 관례라 하여 겨울에는 장치기를 하였음을 적거있다. 정조는 격구를 이십사반 무예의 한 종목으로 택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안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반가의 대표적 놀이인 격구가, 언제부터 민간으로 전해져 장치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조 중기 이후에 급격히 쇠퇴한 반가의 놀이인 격구가 이때를 전후해 민간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수원장치기’의 부흥을 기대하며 수원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치기를 가르쳐 재현시켜, 경기도민속경연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까지 참가를 시키기도 했다. 2004년에는 고등학생들이 용인에서 열린 경기도 청소년민속예술경연대회에도 참가를 하였다. 이렇듯 수원의 장치기는 딴 곳에 비해 미미하게나마 그 전승이 이어져 온 곳이기도 하다. 장치기는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청소년들의 놀이로 장착을 시켜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인 장치기는 장이라는 나무막대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때로는 격한 몸싸움으로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부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보완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전통의 놀이다. 연세가 80세 이상이신 분들 중에는 아직도 장치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장치기 놀이에는 별도의 골문이나 골키퍼가 있진 않다. 그저 넓은 공터 양편에 돌을 놓아 문을 만들고, 편을 갈라 얼레공을 몰고 가 그 문 안으로 들여보내면 된다. 사라지는 우리 전통놀이인 장치기.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아이들의 체력을 위할 수 있는 우리 전통놀이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좀 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