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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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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팽로(柳彭老, 1554년 ~ 1592년)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1]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2]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의 휘하 장수로 활약했다.[1]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다. 개국공신 류만수(柳曼殊)의 후손으로,[3] 아버지는 류경안(柳景顔)이다.[4] 1579년 사머시에 합격하고[5]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출사를 단념하고 옥과에 거주하였다.[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20일 양대박, 안영 등 읍민 주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 휘하의 장수가 되어 제1차 금산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했다.[1]

사후 사간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으며[1] 광주(현 광주광역시)의 포충사금산종용당에도 제향되었다.[6]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고경명, 양대박과 함께 삼창의라 칭해지기도 한다.[7]

각주

[편집]
  1. 안방준, 《은봉전서》 권8, 〈호남의록〉, 유팽로
  2. 곽재우의 기병 날짜보다 이틀 빠르다(홍대영, 〈月坡 柳彭老의 義兵活動〉, 광주교육대학교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 2면의 주석 3번).
  3. 홍대영, 앞의 논문, 3면
  4. 고용후, 《청사집》 권2, 증 사간원 사간 유 공 행장
  5. 《만력7년기묘4월초2일사마방목》(萬曆七年己卯四月初二日司馬榜目)
  6. 홍대영, 앞의 논문, 6면
  7. 조경남, 《난중잡록》 2, 임진년 상,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