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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13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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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姜筮, 1347년 ~ 1424년 음력 10월 19일)은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강군보(姜君寶)의 3남이자 강주(姜籌)의 아버지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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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에 통례문사인(通禮門舍人)으로 관직을 시작해 1379년(우왕 5년) 밀직사부사(密直司副事)로 임명되었다.[1]

1382년(우왕 8) 화척(禾尺)들이 무리를 지어 왜구를 사칭하면서 영해군(寧海郡)을 침략해 관아와 민가를 불사르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임성미(林成味),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안소(安沼), 밀직사부사 황보림(皇甫琳) 등과 함께 이들을 추포했다.[2]

같은 해 판밀직사사로 승진했으며[1], 같은 해 북방에 전쟁의 징조가 있어 당산군(唐山君) 홍징(洪徵), 전 밀직(密直) 류원(柳源)·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동북면(東北面)으로 파견되어 변고를 정탐했다.[2]

같은 해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옮겼으며[1], 1389년(창왕 원년) 창왕(昌王)이 장인 이인임(李仁任)의 장례를 치를 것을 허락하자 경산부(京山府)로 가서 이인임을 장례지냈다.[3]

1391년(공양왕 3) 경상도병마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로 나갔으며, 조선 개국 후인 1403년(태종 3)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로 임명되었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다.

1415년(태종 15) 검교의정부찬성사(檢校議政府贊成事)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치사(致仕)했으며, 1419년(세종 원년) 좌의정(左議政)으로 다시 치사했다.

1424년(세종 6) 향년 78세로 졸했다.[1]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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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 - 강사첨(姜師瞻)[4] : 감찰어사(監察御史)
    • 조부 - 강창귀(姜昌貴)[4] : 판도정랑(版圖正郞),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 아버지 - 강군보(姜君寶, ? ~ 1380년) : 봉산군(鳳山君), 문경공(文敬公)
      • 어머니 - 전객령(典客令) 김여진(金呂珍)의 딸[4]
        • 형 - 강시(姜蓍, 1339년 ~ 1400년)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공목공(恭穆公)
        • 형 - 강책(姜策)[5] : 좌랑(佐郞)
        • 부인 -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황무공(荒繆公) 이인임(李仁任, ? ~ 1388년)의 3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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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종실록』
  2. 『고려사』 「신우전」
  3. 『고려사』 「윤소종전」
  4. 『강시 묘지명』
  5. 『씨족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