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제정국민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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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정 국민 의회(프랑스어: 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영어: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 또는 제헌국민의회프랑스 혁명 직전에 전국 삼부회로부터 이탈한 제3신분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의회로 헌법 제정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테니스 코트의 서약으로 결의했다. 처음에는 《국민의회》라고 칭했지만, 이후 《제헌국민의회》라고 개칭되었다. 입헌 의회라고도 불린다.

중세 이래의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와 달리, 근대적 의회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1791년 프랑스 헌법을 성립시켜 헌법에 근거하는 선거를 실시하였고, 1791년 9월 30일에 의회를 해산하고, 다음의 《입법 의회》가 성립되었다.

역사[편집]

설립과정[편집]

전국 삼부회에서 의결 방법 등을 둘러싼 제3신분(평민)과 제1, 2신분(성직자 , 귀족)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제3신분(그들 자신은 자치 단체라고 칭했다)은 1789년 6월 17일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지도 하에 국민의회의 성립을 선언했다. 하급 성직자들이 합류를 합의했으며 특권 계급의 지지도 얻지 못한 정부도 국민의회를 탄압하려 했다. 이에 대해 의회 세력은 굴복하지 않고 6월 20일의 “테니스 코트의 서약” 등을 통해 철저한 항전의 자세를 취했다. 의회와 정부의 심각한 갈등을 우려한 국왕도 국민 의회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많은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의회에 합류했다. 그 후 국왕의 권고에 따라 너머지 세력도 국민 의회에 참가하여 혼란은 일단 수습되었다. 7월 9일에는 《헌법 제정 국민 의회》로 개칭되어 헌법을 제정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편집]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혁명이 발발하자 혁명이 각지의 농촌에 파급하여 영주에 대한 폭동이 각지에서 발발했다. 이 폭동으로 특권 신분인 귀족, 성직자의 대부분이 망명하고 구체제가 붕괴했다. 이 무질서한 무력 봉기는 특권 신분의 권력은 물론이고 의회까지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며, 의회는 이 사태 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8월 11일에 발령된 법령으로 봉건제의 폐지를 결정하고 사태를 진정 시켰지만, 영주재판권을 비롯한 인격적인 지배를 부정하는 것, 지대 폐지 등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 봉건제 폐지와 아울러, 8월 26일에 《프랑스 인권 선언》(정확하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따라서 그때까지 신분제 사회 구조가 완전히 부정되고 기본적인 인권이 있고, 자유가 있고, 권한이 평등한 시민에 의해 구성되는 시민 사회의 원칙이 확인되었다. 이 의회의 결정은 정부가 인정하는 부분이 아니었지만, 이미 구체제의 붕괴에 의해 정부의 권력은 한계에 다달았기 때문에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국왕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국왕 정부의 권한을 붙들고 있었지만, 절대 왕정은 여기에서 끝난 셈이다. 국민 의회는 이러한 법령을 제정하고 정부 대신 국가의 주권자적 지위를 확립 하였다.

경제, 종교 정책[편집]

1789년 11월 헌법 제정 국민 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 국유화 결정했다. 그리고 그 자금을 담보로 하는 형식으로 1790년아시냐(사실상 지폐)를 발행했지만, 그 신용은 매우 낮아 경제 혼란을 일으켰다.

관련 항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