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허성: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iwoo1 (토론 | 기여)
Huzzlet the bot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의 도움을 받아 동음이의 처리 : 김성일 - 김성일 (무신) 문서로 링크 걸음
4번째 줄: 4번째 줄:
[[1583년]] 선조 16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1583년]] 선조 16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1589년]] [[11월 18일]]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고,[[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출하여, 이듬해 [[1590년]] [[3월 6일]] [[대마도]]로 출발하였다. [[1591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허성은 귀국하자마자 탄핵을 당하여 바로 동래부에 수감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ref>{{웹 인용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1589년]] [[11월 18일]]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고,[[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 (무신)|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출하여, 이듬해 [[1590년]] [[3월 6일]] [[대마도]]로 출발하였다. [[1591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허성은 귀국하자마자 탄핵을 당하여 바로 동래부에 수감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ref>{{웹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2402006_004&grp=&aid=&sid=2122&pos=5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2402006_004&grp=&aid=&sid=2122&pos=5
|제목 = 선조실록 25년, 24권
|제목 = 선조실록 25년, 24권

2009년 7월 16일 (목) 10:25 판

허성(許筬, 1548년~161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공언(功彦)이며,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으로 불렸다. 1548년 조선 조선 명종 3년 부친 초당 허엽과 첫째 부인인 한씨와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로 허난설헌의 큰 오빠이자 허균의 배다른 형제이다.

개요

1583년 선조 16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1589년 11월 18일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고,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출하여, 이듬해 1590년 3월 6일 대마도로 출발하였다. 1591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허성은 귀국하자마자 탄핵을 당하여 바로 동래부에 수감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1]

같이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 등의 동인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허성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주장에 찬성을 하게 된다. [2]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후 이조좌랑, 강원도 소모관, 1593년 사헌부 집의,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과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07년 선조의 유교를 받게 되어서 세인들이 고명칠신이라 칭했다.

평가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좋지 못한 기록들이 많은데, 《선조실록》 수정 32권에는 이에 대한 비판을 실어 허성을 옹호하고 있다.[3]

저서

저서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같이 보기

바깥 링크

주석

  1. “선조실록 25년, 24권”.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 “선조실록 25년, 27권”.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3. “선조실록수정 31년, 32권”.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