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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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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yoma88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2월 11일 (목) 20:16 판

(咸)씨는 한국과 중국의 성씨이다.

한국의 성씨

함(咸)씨 원조(遠祖) 함혁(咸赫=咸王周鍔 )은 중국 한나라 병부상서평장사(兵部尙書平章事)로서 회창 9년 8월 10일 특봉대사마대장군(特封大司馬大將軍)으로 졸군(卒軍 ) 2천명을 거느리고 봉조동래 (封詔東來) 입동국入東國 하였다"라고 기록된다. 함왕주악咸王周鍔을 한자로 풀이하면 (周두루 주)(鍔칼날 악)즉, 칼을 두루 다스리는 군사들의 왕이란 뜻이 된다.​ 함혁(함왕주악)이 중국 한나라 때 병부상서 평장사兵部尙書平章事(국방부 장관)로 졸군(卒軍 ) 2천명을 거느리고 봉조동래(封詔東來)입동국​(入東國)하였다"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는데도 토착세력 운운하는 것은 역사 인식을 바르게 이해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동에 있고 또한 역사는 기록에 의해서만 그 타당성을 입증하는것이다.​

​경주 이씨 세보에 의하면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촌장 알평(謁平)이 함혁(咸赫)과 함께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시기 함혁(함왕주악)은 한강유역의 마한을 다스렸다. 바위구멍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탄생 설화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그가 쌓았다는 함왕성의 둘레가 2만9천 58척(약 9km)라 전한다. 금자광록대부 익화부원군(金紫光祿大夫益和府阮君).(君)으로 기록되는 것은 그가 익화지역 군왕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그가 마한의 군왕(君王)이라는 뜻이다. 알에서 깨어 나왔다는 박혁거세의 혁이나 바위구멍에서 나왔다는 함혁의 赫자는 치민을 위한 숭배적 글자이다. 기록에는 신라 문성왕 때 謚익호 문간공(文簡公)의 시호를 받는다.(단기3179년..서기846년)

1801년 신유보나 1880년 경진보에 의하면 함씨는 신라,고려의 호족 가문으로 그 이름을 떨치는데 2세손 신 (愼) 은 신라대각간 대사마 대장군,3세 숭담은 신라 대아찬 병부상서, 4세 필천 신라대각간 공부상서,,6세 웅진 문화시랑, 7세 용관 대아찬 호부상서,8세 의 는 대아각간 문화시중, 10세 성례 대아찬 삼중대광 중서문화시중,11세 황 호부상서,12세 영조 대아찬 공부상서, 14세 윤 좌부시랑 대사마 대장군,15세 신 호부상서, 17세 우공 중현대부,18세 이지 통례문후,19세 영택은 대사마 대장군 공부상서, 20세 숙 은 신라 말 공부상서와 예부상서로서 고려개국공신 왕규의 아버지이다.

함혁(함왕주악)의 21세손 규(規)는 광주(廣州)생으로 918년 신숭겸 유차달등과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개국공신이다. 그는 왕건의 15비,16비 그리고 혜종 2비의 장인이자 왕건의 16비가 낳은 광주원군의 외조부이다. 왕건이 한강을 중심으로 한 광주(廣州)의 호족세력 함규를 얻은 후 충주 세력을 얻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태조 왕건을 끝까지 옹립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개국공신으로 왕건의 뜻을 받들어 북진정책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갑자보 세록편에 보면 몽고란 때 대사마대장군에 임명되어 적을 물리쳐 평정했다고 전해지는데 왕건은 적을 토평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봉령 정상에 승전비를 세우고 돌거북상을 새겼다. 지금도 양평 병산리 돌거북상이 이를 말해준다

함규(중시조)는 고려개국(高麗開國)에 공(功)을 세운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으로 대광태위,은청광록대부,평란좌명공신,광평시랑으로 몽고군(蒙古軍) 침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출전하여 적병(敵兵)을 물리쳐 평난좌명공신(平難佐命功臣)의 호(號)를 받는다. 염상(廉相),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 왕건의 임종을 지킨 세 재신 중 한 사람으로 태조가 죽자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 때에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양후공(襄厚公)의 시호를 받는데 왕건으로 부터 왕씨 성을 사성 받은 그가 바로 왕규(함규)이다. 태조 왕건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각 지역의 호족세력과의 연을 맺는데 광주(廣州)의 호족인 함규 또한 그중심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한강 유역은 매우 중요한 요충지대에 있기 때문에 막강한 장악력의 함규와 연을 맺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 사후의 그는 역사적으로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혜종이 즉위한 뒤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왕규의 난(王規-亂)으로 갑곳(지금의 강화도)으로 유배되어 그의 일당 300여명과 함께 처형 되었다고 고려사 인물열전에 기록되는데 그의 묘장이 양평 용문산 청학동과 향사동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왕규(王規)의 5세손 함유일의 字는 형천(亨天)으로. 謚號는 양경공(良敬公)이다. 仁宗임금때 순충좌명공신 공부상서를 지내고 明宗조정에 배향 되었다 증 영상(嶺相)이다.

  1. 高麗史99卷-列傳12-咸有一 -001

○咸有一恒陽人太祖功臣廣評侍郞規五世孫也 함유일-항양인태조공신광평시랑규5세손야. 함유일은 항양(恒陽=양평)사람이며 태조의 공신 광평시랑(왕)규-(規)의 5대손이라고 고려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상서(장관)공직을 하고도 80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왕규(王規)의 5대손 유일(有一)에 이르기까지 고려사에서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그당시 왕규의 난(王規의 亂)으로 인한 그 시대적 배경을 짐작할수 있다. 그러나 함유일 묘비에 의하면 왕규의 2세손 진덕은 고려 정종조 때 예부시랑, 3세손 광집은 목종조 때 병부시랑,4세손 희신은 덕종조 때 중부상서 은청광록대부, 5세손 덕후는 고려 정종조 때 상의봉어동정 이라고 나와있다. 80평생을 청빈으로 살다간 그는 근검수절 이입문호(勤儉守節 以立門戶)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함씨 집안의 가훈이 되고 있다.


​왕규의 7세손이자 함유일의 셋째 아들 함순의 字는 자진 號는 市隱 으로 고려 仁宗 임금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시랑에 보직되고 익령현감을 거쳐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으로 증직 ​예부상서 문익공 이다 ​문장이 장성하여 당대의 문장대가인 이인로 .임춘.오세재. 황보항.이담지.조통과 함께 죽림칠현(강좌칠현)이다.

왕규의 8세손 ​기는 고려 신종 때 중부상서,9세손 인보는 강종 때 대사마대장군, 11세손 제는 충열왕 때 관승봉상지제교(官丞奉商知製敎), 12세 함제의 첫째 아들 정挺 의 자(字)는 석정(石挺).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 문익공(文翼公) 함순(咸淳)의 5세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봉랑 전법좌랑(承奉郞典法佐郞)을 거쳐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냈다. 둘째 아들 석주는 고려말 청백리 문신으로 벽상삼중대광 판밀직사 판도판서(壁上三重大匡判密直寺版圖判書)를 지낼 때 평양부 서촌 와령동 구서 등지에 넓은 토지를 개간하고 덕흥군 지란에 출정하여 방천명 현노개 최흑로등과 공이 컸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장서에 종가가 있다고 기록된다. 함제의 셋째 아들 동은 전문형대제학(典文衡 大提學)이다.

13세 정의 아들 함승우(咸承祐)는 중정대부 삼사좌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를 지냈다. 함석주의 아들 함승경은 고려 공양왕 4년, 135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검교(檢校)·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등을 역임하였다. 李朝에 들어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집현전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贈영상嶺相이다. 아들로는 이조 개국공신 함부림과 함부열 함부실의 3형제가 있다. 그가 쓴 친필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한다.

함규(王規)의 14세손 함부림은 강릉함씨 동원군 정평공 시조이다 初褘는 희언(希彦) 字는 윤물(淪物) 號는 난계(蘭溪) 謚號는 정평공(定平公) 138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검열 좌정언을 거쳐 우헌납, 지춘주사, 형조정랑, 병조정랑, 겸도평의사사 사도사를 역임 하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익찬개국공신에 책록되고 예조의랑,좌경기상시겸상서소윤검지의정부사가 되어 동원군의로 개봉되었다 그후 대사헌, 명사신, 형조판서, 각도관찰사, 출소사,동북면도순문찰리사를 역임하고 대광보국종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함부림의 친필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종 20권, 10년(1410 경인 / 명 영락(永樂) 8년) 12월 1일(계사)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이 졸(卒)하였다. 함부림은 강릉부(江陵府) 사람인데, 자(字)는 윤물(潤物)이요, 자호(自號)는 난계(蘭溪)요, 검교 중추원 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다. 홍무(洪武) 을축년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등용(登用)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옮기었다. 공양왕(恭讓王)이 서매, 발탁하여 우헌납(右獻納)을 제수하였는데, 일을 논하다가 왕지(王旨)를 거슬려서 지춘주사(知春州事)로 폄출(貶出)되었다가, 다시 소환되어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중방(重房)의 여러 장수(將帥)가 궁내의 세력을 믿고 동반(東班)을 멸시하니, 함부림이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이와 더불어 겨루다가, 이 때문에 벼슬을 잃었다. 임신년 4월에 태조(太祖)가 국사를 담당하자, 병조 정랑(兵曹正郞) 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경력사도사(經歷司都事)를 제수하였고, 7월에 태조가 천명(天命)을 받으매, 추대(推戴)의 모의에 참여하여 예조의랑(禮曹議郞)에 발탁되고, 훈공(勳功) 삼등(三等)에 책록(策錄)되어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 받았는데, 벼슬이 빨리 올라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겸 상서 소윤(尙瑞少尹)에 이르러 전선(銓選)에 참여하여 주관하였다.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복이 끝나매,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계미년 3월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어, 동원군(東原君)으로 개봉(改封)되고, 갑신년 10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무자년 10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어 그 해를 넘기고 병으로 사면 하였다. 함부림은 강직하여 지키는 바가 있고, 조정에 서서 과감하게 말하고 이치(吏治)에 민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황해도(黃海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와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를 역임하였는데, 청렴 결백한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감사(監司)의 위엄을 떨치고, 일찍이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으니, 부내(部內)가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죽으니 나이 51세였다. 임금이 슬퍼하여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시호를 정평(定平)이라 하였다. 두 아들이 있으니, 함우공(咸禹功)·함우치(咸禹治)이다.

​함승경의 둘째 아들 함부열​은 함부림의 아우인데, 고려 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공민왕 2년에 예부상서이다​ 그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을 반대한 두문동(두문불출이 생긴유례) 72현의 학사로써 폐위 공양왕을 끝까지 섬기다 공양왕 사후 그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고 자신의 묘지 위에 ​가묘로 그 충성을 다한 만고충절의 학사로써 양근함씨 죽계공의 시조이다​. 예판공파의 파조(派祖)인 예조판서 함부실(咸傅實)은 함부림의 4촌 동생이다. 함부실의 아들 함자예咸子乂는 자(字)는 입지(立之). 교리(校理) 함승필(咸承弼)의 손자이며, 예조판서 함부실(咸傅實)의 아들이다. 아우는 함자명이다. 1419년(세종 1)에 율학(律學)으로 잡과(雜科)에 급제하여 사직(司直)에 제수되었다. 그 후 동부령(東部令)에 이어 문화현령(文化縣令)을 지냈다.


15세손 우치는 조선왕조 개국공신 함부림의 아들이다 字는 문명 號는 송담松潭 謚號는 평양(平養), 후後 문희文僖) 아버지 함부림을 닮아 전라도사가 되어 명판결을 많이 남기었다 나주목사와 공주목사를 거쳐 함길도관찰리 사헌부 대사헌 중추원부사 개성부유수 함흥부윤 형조참판 으로 동평군에 책봉되고 의금부사,명사신,형조판서로 좌리공신이 되고 좌참찬을 거쳐 봉조하가 된 후 의정부 좌찬성으로 증직 되었다

​성종 104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5월 29일(갑신) 동원군(東原君) 함우치(咸禹治)가 졸(卒)하였다. 조회와 저자를 철폐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함우치는 강릉인(江陵人)인데, 개국 공신(開國功臣)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문음(門蔭)으로써 관직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고, 고부군수(古阜郡守)·군기부정(軍器副正)·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경태(景泰) 신미년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 계유년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랐고, 얼마 있지 아니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을해년에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병자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천순(天順) 정축년에는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제수되고, 기묘년에는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전보(轉輔)되었으며,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에는 가정대부(嘉靖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으며, 병술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원군(東原君)에 올랐고, 정해년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함에 미쳐서는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으며, 신묘년에는 책훈(策勳)되어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하사(下賜)받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가, 조금 뒤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전보되었다. 계사년에는 좌참찬(左參贊)에 전임되었다가 병으로써 사직하고, 동원군(東原君)·봉조하(奉朝賀)에 제수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2세이다. 시호(諡謚)를 평양(平襄)이라 하였는데, 일을 집행함에 절제(節制)가 있음을 평(平)이라 하고, 일로 인하여 공(功)이 있음을 양(襄)이라 한다. 사람됨이 염근(廉謹 욕심이 없고 조심성이 깊음)하고, 이간(吏幹)이 있었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상명(詳明)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적(聲績 칭찬이 높은 공로)이 있었는데,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함우치는 청렴하고 간결(簡潔)하며, 산업(産業)을 일삼지 아니하였으므로, 청백(淸白)으로써 이름이 있었다.” 하였다.

16세손 영훈의 字는 聖道 호는 만포(晩圃)이며, 중종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함흥감사 공조판서의정부 좌찬성 정헌대부 이다 咸鏡監司 工曹判書 戶曹判書 義政府 左贊成 正憲大夫

17세 함헌(咸軒)의 字는 가중(可中),號는 칠봉(七峯) 1508년(중종 3)출생으로 개국공신 부림(傅霖)의 4대손으로, 아버지는 부호군 좌무(左武)이다. 1534년(중종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서울인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천부사가 되었다. 1562년 삼척부사를 지냈으며, 재임중 관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치적을 남겼다. 만년에는 학풍의 퇴폐를 통탄하고 강릉에 오봉서원(五峯書院)을 짓고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올 때 가져온 공자(孔子)의 진상을 비치하여 추모하면서 후진을 가르쳤으며, 이황(李滉)·정광필(鄭光弼)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칠봉문집』 1책이 있다.

18세손 함록祿 字 *치문稚文 휘는 록錄 병자 별과 형조참의(刑曺參議), 성주목사星州牧使, 양천현령楊川縣領, 김해부사金海府使 19세손 귀정貴珽, 字 화여和餘 號는 제월당(濟月堂) 연안부사 가선대부 대사헌 형조참판 延安府使嘉善大夫大司憲刑曹參判 연안부사 전라좌수사 사헌부대사헌 형조판서 延安府使全羅左水使司憲府大司憲兼刑曹判書 21세손 순진 字는 기팔(基八) 휘는 순진(順振)이며 명천부사 (明川府使)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냈다 통훈대부 병조참판으로 함덕립 장군의 아버지이다

고려 規의 22세손 함덕립 장군 字는 사인(士仁) 號는 수정(水亭) 무과주부(武科主簿) 水亭 咸德立(명종9년 1554.9.15-선조26년1593.10.16) :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주부 벼슬에 올랐으나 곧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던 중 임진년(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절의소를 설청하고 의병들을 모아 행주전투 권율장군의막하로 들어가 전투하던 중 성이 함락되던 날 적탄을 맞고 권율 장군과 함께 용렬히 전사하였다. <선무종훈록>에 오르고 <보성읍지>와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 의병모군(義兵募軍)>

            1. 통문(通文)

나라의 운이 불행하여 도적놈들이 서울을 핍박하여 대가(大駕)가 외로운 성으로 옮겨가시고 적병이 포위를 하여 도로가 막히고, 호령이 통하지 아니하니 존하느냐 망하느냐의 기회가 순식간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오장이 타는 듯 합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 고금에 공통된 의리이니 무릇 혈기를 지니고 있는 자는 마땅히 몸을 잊고 국난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호남은 본시 충의의 고장으로서 전에도 의열(義烈)이 이미 드러났거든 하물며 이렇게 군부(君父)가 포위속에 계실때 이겠습니까? 이제 통유(通諭)하시는 교서가 포위된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한 말씀으로써 도내의 사민(士民)에게 바라시는 바가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읽고보니 실성통곡이 저절로 나와 죽지를 못하여 한입니다. 원컨대 모든 군자들은 각자 분발을 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糾合)하고 군량(軍糧)들을 도와주며 기일에 맞추어 의소(義所)로 모여 한마음으로 적을 섬멸할 것을 다짐합시다. 만약 망설이고 관망을 하거나 무관심 한다면 이는 전일 충렬의 기풍이 땅에 쓸린 셈만 된 것이 아니라 장차 윤기(倫紀)에도 죄를 얻어 고을이나 나라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마음을 합하고 힘을 뭉쳐 함께 나라의 일을 성사시켜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고함
         호남절의용사각위(湖南節義勇士各位)의 좌하(座下)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通文
  國運不幸奴賊逼京大駕移駐孤城賊兵合圍道路阻絶號令
  국운불행노적핍경대가이주고성적병합위도로조절호령
  不通存亡之機決於呼吸言念及此五內如焚主辱臣死古今
  불통존망지기결어호흡언념급차오내여분주욕신사고금
  通誼在有血氣者當忘身赴難而唯我湖南素稱忠義之邦曾
  통의재유혈기자당망신부난이유아호남소칭충의지방증
  在前世義烈已著況此君父在圍之日乎卽者通諭敎書自圍
  재전세의열이저황차군부재위지일호즉자통유교서자위
  中出來無非哀痛之語其責望於道內士민至深切矣讀來不
  중출래무비애통지어기책망어도내사민지심절의독래불
  各失聲痛哭求死而不得也惟願君子各自奮勵投메*而起糾
  각실성통곡구사이부득야유원군자각자분려투메*이기규
  合同志資助兵糧剋期齊會于義所期以一心殲敵如或遲回
  합동지자조병량극기제회우의소기이일심섬적여혹지회
  觀望越視察廢則非但前日忠烈之風掃地盡矣將得罪於倫
  관망월시찰폐즉비단전일충열지풍소지진의장득죄어윤
  紀不容鄕國毋淹(?)刻協心一力共濟國事千萬幸甚
  기불용향국무엄(?)각협심일력공제국사천만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位 座下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 거의문(擧義文 : 의병을 일으키는글)

위 글월로 거의를 고하는 바는 이제 왜적이 창궐하여 우리 강토를 유린하는 데도 이를 막아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미 국토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 또 혈기가 있으면서 어떻게 앉아서 울음으로 적을 죽일 생각만 하고 머리를 들고 곧바로 전진할 생각을 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 도내의 장사(將士)들이 갑옷 투구를 쓰고 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으니 사자(士子)가 된 사람들도 마땅히 팔둑을 걷어부치고 눈물을 뿌리고 맹세를 하며 화살을 질머질 때입니다. 본래 우리 고을은 충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곳이니 어찌 적개심에 불타고 적을 둘러삼킬 마음을 가진자가 없겠습니까? 치마를 찢어 발을 싸매고 나서며 팔을 걷어 올리고 부르고 모여 비록 나무의 무기 대나무 깃대로 라도 모여들어서 왕의 군사가 되고 당나라 안지경(顔眞卿: 安祿山亂時의 義兵將) 같은 행차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은 이 통문을 가지고 돌려 온 고을에 고하고 시각을 지체하지 말도록 해주시기 천만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일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호남 절의소 용사 여러분의 좌하에 고합니다.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擧義文
  右文爲擧義事今者倭賊猖獗躪蹂我疆場而한*禦無一人旣
  우문위거의사금자왜적창궐린유아강장이한*어무일인기
  食國土且有血氣則 安敢生哭殺之而不效載頭直前之策一
  식국토차유혈기즉안감생곡살지이불효재두직전지책일
  道將士관*甲胄以赴賊所則爲士子者亦當奮臂(?)제*誓面帶
  도장사관*갑주이부적소즉위사자자역당분비(?)제*서면대
  箭之日也顧我一州素稱忠義之鄕豈無懷敵愾之憤而欲胸
  전지일야고아일주소칭충의지향개무회적개지분이욕흉
  呑之者哉裂裳左袒一呼偕作雖木兵竿旗響集분*合爲王師
  탄지자재열상좌단일호해작수목병간기향집분*합위왕사
  顔行不其可乎伏願僉尊將此通文輪告一鄕毋滯時刻幸甚
  안행불기가호복원첨존장차통문륜고일향무체시각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僉尊 座下

​또한,임진란 때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고 정묘호란 때 67세의 나이로 용전한 응수(應秀)와 순조,헌종 때 예학시문으로 이름높은 진태,진숭 형제, 제홍,재영,재운 국악명인 3부자. 초대 국악원장을 지낸 재운의 아들 화진이 있고 특히 근대에 들어서는 구한말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일형과 그의 아들 석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군에 총살 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 들어서는 제 3대 부통령을 지낸 태영(台永)이 있고 그의 아들 대통령 비서실장 병춘 사상가 석헌(錫憲),국회의원 종한,석재,승희,진규. 경제인으로 오뚜기 회장 태호 등이 있다.

그외 현대 인물로는 함정훈(서울신문편집국장), 함인섭(농림장관, 강원대총장), 함종찬(국회의원), 함동욱(부통령비서실장), 함재훈(국회의원, 강원일보사장), 함명수(해군참모총장), 함태용(한국장기신용은행장), 함영훈(해외개발공사장), 함응래(변호사), 함영수(농업진흥청장), 함석재(검사), 함성용(미륭상사사장), 함병림(삼송산업회장), 함덕성(천우자동차회장), 함형준(조흥화학명예회장), 함만준(한국냉동사장), 함종규(숙명여대교육대학원장), 함택훈(미국매사추세츠대교수), 함동선(중앙대교수), 함용운(고려대교수), 함연진(고려대교수), 함희석(전남대교수), 함승시(강원대교수), 함형묵(국립시험연구소연구원), 함종욱(중앙대교수), 함정희(이화여대교수), 함순용(명지대교수), 함근배(한국항공대교수), 함경수(연세대교수), 함준수(한양대교수), 함태수(영남대교수), 함태옥(영남대교수), 함일근(외국어대교수), 함성권(한양대명예교수), 함종국(병원장), 함동수(외과원장), 함홍근(이화여대교수), 함의근(서울대의대교수), 함태영(인제대교수), 함수만(치과의원장), 함용주(내과원장), 함종한(국회의원), 함종빈(국회의원), 함태균(군산대교수), 함호준(아주대교수), 함인영(미국펜실베이니아주립대교수), 함태식(서원대교수), 함원국(울산대교수), 함영림(이화여대교수), 함창곡(한양대교수), 함태진(경원대교수), 함용도(경원대교수), 함태상(관동대교수), 함건주(인제대교수), 함영훈(한국항공대교수), 함영천(한국체육대교수), 함규황(경남대교수), 함계운(경상대교수), 함병문(서울대교수), 함운철(전북대교수), 함옥상(계명대교수), 함영민(단국대교수), 함도시(동의대교수), 함기선(성형외과원장), 함세정(충청실업전문대교수), 함병선(육군중장, 국방대학원장), 함명수(해군참모총장, 국회의원), 함덕선(육군준장), 함태상(공군소장), 함정호(변호사), 함영업(변호사), 함승희(검사), 함귀용(검사), 함택삼(교통안전협회이사, 치안감), 함기성(횡성,원주, 영월군수), 함종태(강릉문화재위원장), 함원국(한의원장), 함길환(한의원장), 함인찬(한의원장), 함영준(조선일보기자), 함명철(문화방송기자), 함재기(강원운수사장), 함기원(농협장), 함기태(부산역장), 함영우(항일운동가), 함원용(해군소장), 함태호(해군대령) 씨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강릉함씨는 1985년에는 총 13,265가구 54,980명, 2000년에는 총 17,662가구 56,71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3,943명, 부산 1,914명, 대구 1,562명, 인천 2,465명, 경기 8,646명, 강원 11,797명, 충북 2,292명, 충남 3,400명, 전북 1,908명, 전남 2,065명, 경북 2,895명, 경남 1,655명, 제주 440명이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강원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2,511명, 부산 1,836명, 대구 1,944명, 인천 4,073명, 광주 606명, 대전 1,190명, 울산 849명, 경기 13,200명, 강원 9,098명, 충북 2,245명, 충남 2,229명, 전북 1,670명, 전남 1,103명, 경북 2,589명, 경남 1,202명, 제주 373명이다. 경기, 서울, 강원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각주)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함씨는 신라 자사紫事 문간공文簡公 혁赫, 고려 개국공신 양후공襄厚公 규規),조선 개국공신 난계蘭鷄 정평공定平公 함부림咸簿霖,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부통령 송암松岩 함태영咸台永에 이르기까지 개국공신을 모두 배출한 유일한 가문이다. 모든 함씨는 함혁을 시조로 하는 일족으로 강릉함씨의 시조는 동원군 정평공 부림簿霖이고 양근 함씨의 시조는 죽계공 부열 簿說이다. 조선의 기록을 따르는게 타당한 우리의 역사인데, 일부 종족들 중에는 강릉함씨 시조가 고려 폐위왕 김주원을 따라서 강릉에 정착한 함신이라거나 고려시대 때 함제가 강릉에 정착해 살았다며 함제를 강릉 함씨 시조로 여기는 것은 역사적 오류이다. 물론 그 분들이 강릉에 살았던 기록은 있지만, 조선개국공에 공을 세우고 동원군(강릉군)으로 봉해진 정평공 함부림이 강릉함씨 시조이고 이성개의 조선개국을 반대하고 두문동 72현의 만고충절의 학사인 그의 아우 죽계공 함부열이 양근 함씨 시조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종족님들은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필자는 동원군 정평공파 34세손으로 13세조 할아버지는 수정공 함덕립 장군이시다.

항 렬 표

  • 30세;-재,기(在,基),31세;-호,종(鎬,鍾),32세;-영,용(泳,溶),
  • 33세;-식,주(植,柱),34세;-형,희(炯,熙),35세;-균,규(均,圭),
  • 36세;-석,현(錫,鉉),37세;-수,태(洙,泰),38세;-동,상(東,相),
  • 39세;-열,환(烈,煥),40세;-대,중(戴,重),41세;-진,선(鎭,善),
  • 42세;-승,연(承,演),43세;-모,표(模,杓),44세;-찬,훈(燦,勳),
  • 45세;-배,철(培,喆),46세;-ㅇ탁(ㅇ鐸),47세;-청,준(淸,浚),
  • 48세;-수,근(秀,根),49세;-환,엽(煥,燁),50세;-중,교(中,敎),
  • 51세;-선,순(銑,錞),52세;-락,호(洛,浩),53세;-이,격(利,格),
  • 54세;-지,묵(志,默),55세;-길,각(吉,珏),56세;-은,수(銀,銖),
  • 57세;-해,철(海,澈),58세;-걸,직(杰,稙),59세;-사,희(思,熹),
  • 60세;-수,기(壽,起),61세;-영,용(鈴,鎔),62세;-양,구(洋,求),
  • 63세;-근,동(槿,棟),64세;-헌,조(憲,照),65세;-서,장(瑞,壯

중국의 성씨

중국의 함씨는 6개 정도의 다양한 계통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초나라 공족과 그 관할 지역 호족들이 많이 다양하게 성씨을 취득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한족 계통과 소수 민족 계통이 존재하는 성씨이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