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삼도수군통제영
| 종목 | 사적 제402호 (1998년 2월 20일 지정) |
|---|---|
| 면적 | 46,640m2 |
| 시대 | 조선시대 |
| 소유 | 국유, 공유, 사유 |
![]() | |
| 주소 | 경상남도 통영시 세병로 27 외 (문화동) |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통영 삼도수군통제영(統營 三道水軍統制營)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저로, 삼도수군의 본영이다. 1998년 2월 2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2호 통제영지(統制營址)로 지정[1]되었으나, 2011년 7월 28일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2]되었다.
지정 사유
[편집]통제영지는 조선 선조 36년(1604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창건, 고종 32년(1895년) 폐영될 때까지 약 300년동안 해상요충의 총사령부로서 번성을 이루었던 곳으로서 문헌상 기록이나 1996년에 실시한 바 있는 지표조사결과에 의해 당시의 통제영에 있었던 100여동의 주요 관아건물들의 위치확인이 가능하고 동 유적의 국방유적지로서의 중요성 및 역사성 등이 인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다.
연혁
[편집]통제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선조 16년(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새로 만들어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이를 겸임케 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제사의 본영을 삼도수군통제영 또는 약칭으로 통제영, 통영이라 했으며, 임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선조 36년(1603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곳 두룡포(현 통영시 관내)로 정하고는 통제영터를 닦기 시작하여 2년만인 선조 38년(1605년) 음력 7월 14일 세병관, 백화당, 정해정 등을 창건하여 고종 32년(1895년) 각도의 병영 및 수영이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만 남겨두고 대·소 관아 100여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이후 학교, 법원, 검찰청,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975년 세병관 및 주변지역을 정비하고, 1996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유구가 확인되었다.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은 주요 관공서 건물이 들어서 있다. 통제영지는 동남향으로 통영 앞바다를 굽어보는 지형으로 통제영지 주변일대는 일반 주택지로 되어 있다.
최근에 통제영지 내에 있는 법원, 검찰청사, 세무서, 학교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이전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구성
[편집]방어시설
[편집]- 통영성
- 숙종 4년(1678) 통제사(58대) 윤천뢰가 쌓기 시작하였다.
- 북문 북쪽 여항산(해발 173.9m) 기슭에서 동쪽과 서쪽의 고지를 연결하여 서문 북쪽 산기슭까지는 흙으로, 그 외 나머지 구간을 돌로 쌓았다. 그 규모는 3,600m(또는 2,800m·5,700m라고도) 정도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3]
- 사대문과 동서 암문, 세 곳의 포루가 있었고, 원문성이 바다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 통제영이 해체되면서 성벽과 문루를 헐어버렸고, 남아 있지 않다.

- 원문·원문성
- 원문(轅門)은 통영의 군문으로 통제사의 직무교대가 이루어졌다.
- 원문이 세워지기 전까지 고성에서 통제영으로 들어오는 육로가 없어, 원문고개 바깥 마구산(馬廐山) 아래의 해안에서 나룻배를 타고 작은개(小浦) 동쪽의 굴리포끝(屈理浦末. 속칭 구루지끝)으로 건너 다시 명정동 고갯길을 넘어 통영으로 들어왔었다.
- 숙종 8년(1682년) 통제사(61대) 원상(元相) 재임기에 통제영으로 오가는 유일한 육로의 북쪽 10리 지점에 세웠다. 《통영지》에는 "원문은 영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육로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이다"(轅門在營之北十里 卽陸路咽喉處)라고 하였다.
- 영조 18년(1742년) 통제사 송징래(宋徵來) 재임기에 원문 좌우로 성가퀴 각 열 첩씩 원문성(轅門城)을 쌓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정조 9년(1785년) 통제사 이방일(李邦一) 재임기에 북신만과 죽림만의 양쪽 해안까지 늘려 쌓았다.
- 원문의 2층 누각은 천하의 백성들이 임금의 덕을 우러러 받들고 귀의한다는 뜻의 공신루(拱辰樓)이라 했다. 그리고 다락 위층에는 '삼도대원수원문'(三道大元帥轅門), 아래층에는 '삼도대도독원문'(三道大都督轅門)이란 큰 편액이 각각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 원문성 안에는 작은 우물과 인근 안정사(安靜寺)에서 공물로 바친 종이를 관리하는 원문창(轅門倉)이 있었는데, 숙종 33년(1707년)에는 동호동 남망산 해안의 옛 해송정(海松亭, 속칭 해송지이) 마을에 있던 것을 창골(倉谷, 현 중앙동)로 옮겼다가, 순조 5년(1805년) 통제사 유효원(柳孝源) 재임기에 원문성 안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 통영시 시내와 북쪽 외곽을 구분하는 고개의 이름인 '원문고개'라는 지명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내부 건축
[편집]
- 망일루(望日樓)
- 세병문(洗兵門)이라고도 한다.
- 광해군 3년(1611년) 통제사(제10대) 우치적 재임기에 세웠으며, 영조 45년(176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통제사(제128대) 이국현이 다시 세웠다.
- 통행 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 2000년에 중건하였다.
- 운주당(運籌堂)
- 통제영의 내아(內衙)에 해당하며, '운주유악지'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다.
- 인조 23년(1645년) 통제사(21대) 이완 재임기에 세워졌다.
-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이 들어섰다.
- 경무당(景武堂)
-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건물이 들어섰다.
- 백화당(百和堂)
- 통제사의 집무실이다.
- 선조 36년(1603년) 통제사(6대) 이경준이 세병관과 함께 세웠다.
- 1775년 화재로 불탄 뒤 통제사(132대) 조완이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됐다.
- 12공방, 선자방
-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남품한 곳이다.
- 통영초등학교가 들어섰다.
- 중영 및 중영내아
-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이다.
- 통영세무서 건물이 들어섰다.
- 파취헌
- 충렬여자중학교가 들어섰다.
- 분뇨정
-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섰다.
- 세병관
- 통제영의 객사이다.
- 수항루(受降樓)
- 숙종 3년(1677년) 통제사(제58대) 윤천뢰 재임기에 임진왜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 매년 행하는 춘추군점 때 가왜장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의식을 행하던 곳이었다.
- 통영성 남문 바깥에 위치하였으나 해안선 매립으로 선착장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1987년에 이전 복원되었다.
- 통제영 수항루
- 통제영 수항루
- 통제영 수항루
- 통제영 수항루
- 수항루(우면)
기타
[편집]- 착량묘(鑿梁廟)
- 초대 통제사 이순신이 선조 31년(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을 때 이를 애통하게 여긴 이 지방 사람들이 그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착량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정성껏 그를 모셔온 것이 시초였다.
- 고종 14년(1877년) 그의 10대손인 이규석이 통제사로 있을 때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호상제를 지어 지방민들의 자제를 교육하였다.
- 충렬사(忠烈祠)
- 선조 39년(1606년) 통제사 이운룡 재임기에 세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 사직단(社稷壇)
- 사직단은 전국 각지에 세워졌으며, 통제영이 소재한 통영에도 사직단이 존재하였다.
- 《통영군지》(1934년 발간)에는 통영의 사직단이 해운대(海雲臺)의 동쪽에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통영 사직단에 대해 언급한 거의 유일한 문헌 기록이다. 김세윤 전 통영문화원장(1932~2017)은 해운대에 대해 "옛 통영군청 혹은 비치호텔 뒤로 보이는 야산"이라고 증언했었다.[4]
- 《통영신문》 2021년 6월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통영시 비지정문화재를 조사하던 최헌섭 두류문화문화재연구원장에게 김상현 통영인뉴스 대표가 "통제영 사직단 추정지가 있는데 확인해 보겠느냐"라고 해서 4월 2일 임학종 전 김해박물관장 등 네 명과 함께 현장에 가게 됐고, 삼나무숲 사이에서 남-북, 동-서 방향으로 사각형 형태의 제단과 이를 둘러싼 낮은 담장의 흔적과 그 주변에서 여러 장의 기와 조각도 수습하였다고 한다.[5]
- 둑사당
- 둑제를 지냈던 사당이다.
전설
[편집]세병관의 건립
[편집]통영 세병관의 건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통제사 이경준 시절에 세병관을 세우기 위해 터를 닦아 기초석을 놓고 아름드리 기둥을 세우는데, 장정 수십 명이 달라붙어 세우고 나면 금방 넘어지고 해서 공사에 진척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이경준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공사 터의 한가운데를 파면 물이 솟아 우물이 생길 것인데, 사시(巳時)께 이곳 고갯길에 철립(鐵笠)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 사람을 잡아다 우물에 집어넣고 고사를 지내면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경준은 새벽부터 군사를 동원해 우물을 파게 하고 사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멀리서 고갯길로 검은 철립을 쓴 사람이 오는 것이 보여서 이를 잡게 하였다. 잡고 보니 삼월 삼짓날을 맞아 부침개를 부치려고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가던 비구니였다. 이경준은 그 비구니를 우물에 빠뜨렸고, 세병관은 완공되었다.[6]
장한식은 이 전설이 세병관 건설에 많은 승려가 동원되었고 그 희생이 적지 않았음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하였다.[7]
토성고개
[편집]토성고개는 통제사 윤천뢰가 쌓은 토성(土城)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통영으로 부임하는 통제사들은 이곳을 거쳐서 성으로 들어왔다. 한편 토성고개를 토성(吐聲) 즉 소리를 지르는 고개라고 하는데, 통영 지역에서 전하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우둔한 통제사가 정기적으로 정해진 수조 도중에 그만 실수로 서쪽의 훈련 한계선을 넘었고, 이를 본 누군가가 통제영 인근의 고갯마루에 올라가 "통제사가 반역을 시도했다"고 목에서 피가 나도록 고함을 쳤다. 이후 통제사는 한계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파면되고 처형되었으며, 통제영 인근의 고갯마루를 '토성(吐城)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토성고개의 전설과 관련하여 인조반정(1623년) 당시 전임자인 원수신에서 신임자인 구인후로의 삼도수군통제사 교체 과정에서 벌어졌던 유혈사태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8]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문화체육부고시 제1998-5호, 《문화재사적지정》, 문화체육부장관, 1998-02-20
- ↑ 문화재청고시제2011-116호,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7560호, 392면, 2011-07-28
- ↑ 장한식 (2018), 21쪽.
- ↑ "기록뿐인 삼도수군통제영 사직단 위치·규모 가늠할 흔적 찾아냈다" 《부산일보》 2021년 6월 17일
- ↑ "통제영 사직단 터 확인, 담장 기와도 발견" 《통영신문》 2021년 6월 17일자
- ↑ 장한식 (2018), 107-108쪽.
- ↑ 장한식 (2018), 108쪽.
- ↑ 장한식 (2018), 35쪽.
참고문헌
[편집]- 장한식 (2018), 《통영 역사여행 길잡이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 도서출판 삼수야
외부 링크
[편집]-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