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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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융(姜融: 미상 ~ 1349년[1])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래 이름은 강장(康莊)이다.
생애
[편집]강융의 할아버지는 진주의 관노였다.[1]
그는 충렬왕과 충선왕이 대립했을 때 충선왕을, 충혜왕과 충숙왕이 대립했을 때는 충숙왕을 지지했다.[2] 충선왕 재위기에는 내부령(內府令)에 있었다.[3]
충숙왕 재위기에는 단성협대공신(端誠協戴功臣) 칭호를 받고 1325년(충숙왕 15년) 찬성사(贊成事)에 올랐으며[4]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에 봉해졌다.[1] 1335년(충숙왕 후 4년)에는 첨의좌정승 판삼사사(僉議左政丞 判三司事)로 임명받았다.[5]
효자 황수(黃守)의 집을 보러 평양부를 방문했었다.[6]
김개물과 갈등했고[7] 김직방(金直邦)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다.[1]
아들로는 강천유(姜千裕)가 있다. 그의 누이는 김경직(金敬直)의 며느리다.[1]
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고려사》 권124, 〈열전〉37, [폐행], 강융
- ↑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복위년(1308년) 11월 16일(신미); 권124, 〈열전〉37, [폐행], 강융
- ↑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원년(1309년) 3월 10일(계사)
- ↑ 《고려사》 권35, 〈세가〉35, 충숙왕 15년(1328년) 4월 2일(갑오)
- ↑ 《고려사》 권35, 〈세가〉35, 충숙왕 후 4년(1335년) 4월 25일(정축)
- ↑ 《고려사》 권121, 〈열전〉34, [효우], 황수
- ↑ 최해, 《졸고천백》 권1, 故司憲持平金君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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