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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 하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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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성씨]]
[[분류:대한민국의 성씨]]

2009년 6월 14일 (일) 07:06 판

진양하씨(晉州河氏)한국(韓國)의 성씨(姓氏)로 본관은 70여 본이 문헌에 전하나, 대부분 하씨의 세거지(世居地)이며, 그 중에서 확실한 것은 진양(晉陽)·안음(安陰)·강화(江華)의 3본이라고 한다.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을 지낸 하공진(河拱辰)이다.

본관 연혁

진양(晉陽)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하씨(河氏)는 삼한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하고 《진양하씨대동보(晉陽河氏大同譜)》에도 고려시대부터 성족(盛族)이었다고 하지만 입증할 문헌이 없다. 그 시조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다만 조선 문종 때 하연(河演)이 《신미보(辛未譜)》를 편찬하면서 작성한 서문에 의하면 크게 3가지 계통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고려 현종 때 좌사시랑(左司侍郞)을 역임했고 사후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波)이며 둘째는 고려 정종과 문종 연간에 걸쳐 사직(司直)을 역임한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波)이며 세째는 고려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단계공파(丹溪公波)이다. 본관을 진양으로 하게 된 것은 고려 충렬왕 대 하즙(河楫)이 누대로 선조들이 당시의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보고 그 지명을 딴 데에서 유래한다.

분적종 및 분파

하씨(河氏)는 81본(本)까지 기록하는 문헌이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 시조가 분명한 것은 진양(晉陽), 안음(安陰), 강화(江華) 3본(本)이다. 오늘날에는 대개 모든 하씨가 진양(晉陽)에서 분적한 것으로 본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진양(진주)하씨는 16개의 본관에 65,965가구 총 209,75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

바깥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