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 (15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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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1550년)
출생1550년
사망1593년
진주성
사인전사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武愍).
학력1572년 선조 5년에 무과에 급제
직업무신, 군인

황진(黃進, 1550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武愍)이다.[1]

개요

1550년 황희의 5대손이자, 황윤공의 아들로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나다. 1572년 선조 5년에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어 함경도에서 6년을 근무하였다. 거산도찰방, 안원권관 등의 하위 관직을 거쳐 선전관이 되었다.

조선통신사

1590년 황윤길(黃允吉) 일행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이 되었고 왜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2]

1592년 6월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하자, 이광(李光)이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나아가 수비하게 하였다. 황진도 이광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적의 침입을 방비하였다.[3] 용인의 전투에서 패하여 남하 하던 중, 진안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였다.

이치 전투

대둔산 휴게소에 세워진 이치대첩비

7월 훈련원판관으로 이치전투(梨峙戰鬪)에 참가, 왜적을 격퇴하였다. 왜군의 대병이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치를 점거하여 총탄에 맞는 부상까지 입으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과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을 떨치게 되어 이 공으로 황진은 익산군수와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였다.[4]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과 싸웠으며,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에 옮긴 다음 군대를 훈련시켰고, 죽산성의 왜군과 대치중 왜군이 안산성을 탈취하고자 죽산성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이들과 맞서싸우며 죽산성을 점령하였고,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대파시켰다.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6월 10만의 왜군이 진주를 공략하자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벌이다 9일간의 항쟁 끝에 전사를 한다.

사후

그의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같이 보기

주석

  1. 황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선조실록수정 24년”.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5권 
  3. “선조실록수정 25년”.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6권 
  4. “선조실록수정 25년”.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