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 (군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11월 10일 (일) 20:45 판

이의(李嶷 또는 李薿, ? ~ ?)는 고려 말기의 무신, 군인이며, 자(字)는 신지(信之), 원군(原君), 호는 퇴은(退隱)이다. 본관은 우계(羽溪)[1]이다. 1388년 제1차 요동 정벌에 종군하여 선봉으로 요동을 공략하였으며, 밀직부사로 재직 중 1392년 7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순흥 소백산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중추원부사와 도평의사사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소백산에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토지와 전답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쌓아두어 영주의 구두들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이억(李嶷)으로도 부른다.

생애

중추원부사 이사성(李思誠)과 부인 영양남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고려 공민왕문과(文科)에 급제, 유장(儒將)으로 강계원수로 있을 때[2] 1388년(우왕 4년) 음력 5월 이철성원수(泥鐵城 元帥) 홍인계(洪仁桂)와 함께 먼저 요동에 들어가서 적군들을 죽이고 돌아오니, 우왕이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하사받았다.[3]

1392년(공양왕 4년) 음력 6월 김용초(金用超)ㆍ김을귀(金乙貴)ㆍ김균(金稛) 등과 함께 밀직부사에 임명됐다.[4] 그 후 재차 원정하여 요동정벌할 때 이성계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개국 하고, 이때 가정대부 중추원부사도평의사사의흥친군위동절제사(都評議事司兼 義興親軍衛 同節制使)를 제수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이라는 절의하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小白山) 아래 순흥으로 퇴거하였다. 태조(이성계)는 여러차례 소명하였으나 불응하자 태조는 교지를 내려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였으며[2] 원종공신으로 포상되었다.[5]

태조는 토지와 전답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쌓아두어 영주의 구두들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이태조(李太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그가 나가지 않으므로 특별히 교지(敎旨)를 내렸는데 교지에 이르기를 "내 막하에서 어렵고 위태로움을 우릅쓰고 나의 오늘이 있음이 너의 공(功)아님이 없으니 개국 원종공신 일등에 녹(錄)하게하고 전장과 노비를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이태조가 하사(下賜)한 공물(貢物)을 내가 받겠는가 생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이 일대에는 각 고을에서 보내온 곡물이 해마다 쌓이고 쌓여 큰 노적가리가 여기 저기 아홉 무더기나 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아홉 무더기가 쌓인 이 일대를 속칭 구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몰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영풍군 단산면 병산리 화석(현,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화석)에 위치하고 있다.

가족

    • 아들 : 이원길(李原吉), 직장
      • 손자 : 이효강(李孝綱)

주석

관련 항목

참고 문헌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동사강목
  • 태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