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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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침(李龜琛)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종의 왕자군 수도군의 5대손이다. 본관은 전주.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웅천현감(熊川縣監)‧육조낭청(六曹郞廳)‧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平安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사후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추증되었다.

생애

서울 태생으로 정종의 서7남 수도군(守道君)의 증손인 군산군(群山君)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전관에 재직 중 중종 31년(1536년) 왕명으로 홍문관 정자 이승효(李承孝), 검열 홍춘년(洪春年)등과 함께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가서 7월 이후 유생들의 도기(到記) 를 가져왔다.

이후 시관으로 무과를 주관하다가 시관(試官)으로서 사정을 쓴 일로 하여 체직당하였다. 1536년(중종 31) 임금으로부터 진법(陣法)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 뒤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이르러 중종 38년(1543년) 사사로이 청탁을 받고 응시자의 편의를 봐주었다가 면직당했고, 이어 동서 정랑(正郞) 이영성(李永成)의 상사를 외면했다 하여 탄핵받고 면직된다. 사헌부는 시관(試官)으로서 사정을 쓴 일로 하여 체직당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갑자기 정직(正職)에 서용했으니 자못 징계하는 뜻이 없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고(故) 정랑(正郞) 이영성(李永成)은 바로 귀침의 동서(同壻)입니다. 그가 죽자 한번도 가보지 않았는가 하면 또 입관(入棺)하는 날에는 손님을 모아 잔치를 하는 등 방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동서 사이는 복이 없는 친척이기는 하지만 한집안의 초상이라고 할 만한데 길가는 사람 보듯 하였습니다. 그의 소행이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물론이 그르게 여깁니다. 파직시켜야 된다며 탄핵하니, 왕이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해 7월 24일 점마 별감(點馬別監)에 의망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이후 육조 낭청(六曹郞廳)으로 명종 1년 1546년 9월 13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이세장(李世璋) 등과 함께 봉성군 이완을 탄핵하였으나 명종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559년(명종 14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나갔고, 동년 3월 6일 방비를 잘했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향표리(鄕表裏) 한 벌을 사급(賜給)받았다. 동년 5월 27일 직무태만으로 어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마땅한 후임자가 없어 잉임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7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선발되고 7월 13일 왕의 특명으로 한자급 승자하였다. 8월 19일 호군(護軍)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파견되어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그 뒤 명종인순왕후 심씨의 외숙 이량이 전권을 잡자 그에게 아부하여 2품으로 승진했다. 이양(李樑)에게 아첨하여 종이 상전을 섬기듯 하였다. 무수한 뇌물을 바쳐 그의 환심을 샀고, 그 인연으로 내전(內殿)에 붙어 갑자기 2품에 올랐다. 156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명종 18년(1563년) 10월 1일 변경 지역의 방비에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이유로 사헌부로 부터 파직을 청하는 탄핵을 당한 뒤, 세 번 탄핵당하였으나 파직은 과하다는 왕의 특명으로 체직되었다.

선조 5년(1572년) 임신 11월 13일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선조 6년(1573년) 5월 2일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귀침(李龜琛)이, 간원(諫院)이 교망(驕妄)하고 잔학하다고 아뢰어 탄핵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사후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추증되었다.

가계

참고 문헌

  • 중종실록
  • 명종실록
  •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