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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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王脩, ? ~ 220년 이전)는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숙치(淑治)이며 청주(靑州) 북해군(北海郡) 영릉현(營陵縣) 사람이다.

생애

청렴하고 공명정대하며 강직한 인물로 명성이 높았다. 초평(初平) 연간에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을 섬겼으며, 고밀후국(高密侯國)의 영(令)을 지냈다. 이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나, 도읍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 후 왕수는 교동후국(膠東侯國)의 영이 되었는데, 그 지방의 유력 호족인 공사노(公沙盧)는 그 집을 중심으로 진채와 참호를 세우는 등 방비를 굳건히 하며 공융에게 저항하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 왕수는 단지 부하 몇 명을 대동하고 공사로의 집에 쳐들어가 공사로 형제를 죽였다. 공사씨 일가는 경악하여 이후론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건안(建安) 원년(196년), 공융은 원담(袁譚)에게 청주를 빼앗겼다. 청주를 평정한 원담은 왕수를 초빙하여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으나, 민정에 무능한 인물이었던 원담은 왕수의 명성을 보고 관직에 앉혔을 뿐 왕수의 능력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으며, 청주의 별가(別駕 : 주자사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주의 2인자이다.) 유헌(劉獻) 역시 왕수를 시기하여 자주 헐뜯었으므로 중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원담의 부친 원소(袁紹)에게 부름을 받아 기주로 불려가 즉묵후국(卽墨侯國)의 영이 되었으며 그 뒤 청주로 돌아갔을 때는 청주별가에 임명되었다. 이후 원담은 왕수를 신뢰하여 중용하였다.

건안 8년(203년), 원담은 원소의 뒤를 승계한 동생 원상(袁尙)에게 반발하여 마침내 원상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배하여 남피(南皮)로 퇴각했다. 이때 왕수는 청주의 군사들을 모아 원담을 구원했으며 또한 원담에게 원상과 화해하고 흉신(원상을 선제공격할 것을 종용한 곽도(郭圖)와 신평(辛評)으로 여겨진다)을 죽일 것을 간하였으나, 원담은 듣지 않았다.[1] 그 후 원담은 곽도의 진언에 따라 조조(曹操)에게 항복한 후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이로 인해 조조와 대립하게 된다.

건안 10년(205년), 조조가 남피를 침공하자 왕수는 원담을 돕기 위해 군세를 이끌고 갔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원담은 패하여 죽었다. 왕수는 옥문에 걸려있는 원담의 머리 아래에서 통곡하며, 원담을 장사지내도록 해줄 것을 조조에게 부탁하여 원담을 정중히 매장했다.

조조는 왕수의 충절을 높이 사 등용하였으며, 왕수는 사공연(司空掾) · 사금중랑장(司金中郞將) · 위군태수(魏郡太守)를 지냈다. 이때 상벌을 엄격히 정한 법을 제정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평판이 높았다.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진 건안 21년(216년)에 대사농(大司農) 겸 낭중령(郎中令)으로 승진하였으며, 재임 중 죽었다.

《삼국지연의》 속 왕수

원담에게 원상과 화해할 것을 진언할 때 원담의 분노를 사 쫓겨나며, 이외의 모든 부분은 사실(史實)과 같다.

왕수의 친족관계

주석

  1. 혹은 "들어줄 수 없었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