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삼국 시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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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1년 전 (Synparaorthodox님) - 주제: 삼국지와 삼국에 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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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도[편집]

틀렸어요 지도가... 중국의 삼국시대에는 요동이 중국땅이 아니라 조선땅이에요. 틀린지도입니다. 정사 삼국지를 좀 읽어보세요(삼국지는 삼국지연의가 아닌거 아시죠?)_

그때 조선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신기합니다. -- 세오테뤼(··) 2007년 1월 29일 (월) 01:40 (KST)답변
지도보면 요동에서 평양까지 중국땅인데... 삼국시대에 언제 요동에서 평양까지 삼국이 들어왔나요. 완전히 틀린거에요. 고조선 부여 삼한 진국 옥저 동예 영토와 겹치죠? 틀린지도입니다.

삼국지와 삼국에 대한 착각[편집]

이 글은 어디까지나 오리지널 리포트일 뿐입니다. 다만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1. 삼국 정립 : 많은 사람이 적벽대전을 삼국 정립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전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관 전투, 익주 공방전, 한중 공방전이 끝난 뒤에야 삼국이 정립합니다. 적벽대전은 굳이 따지자면 유비가 처음으로 “세력다운 세력을 얻은” 전투입니다. 하비 전투(서주 전투) 때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세력을 이루었을 거라고요? 글쎄요. 훈련도 하지 않고 사기도 바닥을 기는 수천 병력으로는 수십만의 조조군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2~3만의 여포군도 막지 못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백성이 유비를 기꺼이 받아들여 함께 싸우려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유비의 세력은 서주의 극히 일부였고, 서주목의 통치를 받는 백성은 기껏해야 10~15만 정도였습니다(나머지는 투항하거나 조조를 막다가 죽습니다). 당시 서주의 인구는 150~200만이었는데, 겨우 그 정도만 서주목의 통치를 받았을 만큼 서주목 도겸의 횡포는 도가 지나쳤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조조에게 싸우지도 않고 투항합니다. ㅡㅡ; 적대한 자들은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서 말한 대로 시산혈해를 만들게 됩니다. 게다가 하비 전투는 조조와 여포의 싸움이지, 《삼국지연의》에서 말한 대로 유비와 조조의 싸움이거나 유비-조조 연합군과 여포의 싸움은 아닙니다.
  2. 관도 대전과 적벽 대전 : 관도 대전은 “북방”의 싸움이 아니라, “중원”의 싸움입니다. 한나라 때 중국인에게 중요한 지역은 장강 이북과 동부 평야 지대이지 장강 이남이나 서부 오지가 아닙니다. 적벽 대전이 중요하게 된 때는 강남 개발이 완료된 남송 이후이고, 서부 오지가 중요해진 때는 근대 이후입니다. 후대의 소설가들이 한대의 장강 이남의 인구를 2~3배 많아 보이게끔 서술합니다. 그런데 그 인구가 삼국 정립 이후에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 버립니다. 난민은 난민일 뿐이고, 절대 “백성”(또는 “국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오나라의 인구로 기술하면서 물산이 풍부한 강남 어쩌고 하면서 적벽 대전을 기술합니다. ㅡㅡ; 또한 관도 대전 때 동원한 조조군이 적벽 대전 때 동원한 군대보다 많습니다. 북방 유목민이나 청주병은 대부분 둔전병을 빙자한 농민(일꾼)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그들을 군대로 받아들여도 쓸 수가 없습니다. 유목민이 강병이기는 하지만 기존 기병대와 호흡을 맞추어야 하고, 농민군은 훈련을 처음부터 시켜야 합니다. 급히 쓸 수 있는 데라고는 농토 개간 등과 같이 일손이 필요한 곳뿐입니다.
  3. 지략의 제갈량 정치의 사마의? : 전투를 기술할 때 제갈량이 지략에 뛰어난 듯이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갈량의 업적은 군사(군대 사령관)가 아니라 정치가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삼국시대에 최고 전략가는 가후이고, 그 다음이 사마의입니다. 그 뒤로 제갈량이나 방통도 나오겠지만, 제갈량이 최고가 아닙니다. 또한 최고 정치가제갈량이고, 그 뒤로 사마의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 나오겠죠.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가후를 깎아내리고, 사마의를 깎아내리면서 제갈량을 최고 전략가이면서 최고 정치가로 올려놓게 됩니다. 참고로 가후는 단 한 번도 틀리거나 나쁜 결과가 나올 계책(실패한 계책)을 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마의도 비슷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러 번 제갈량에게 당하지만, 그게 전부 “승전”입니다(다시 말해 제갈량의 패전입니다). 사마의의 패전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만큼 《삼국지연의》에서는 역사를 교묘히 비틀고 있습니다(제갈량의 패전이라고 하고 있으니 왜곡은 아니고, 그렇게 착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뿐이죠.).
  4. 유비는 도의에 따르는 사람? : 《삼국지》에서는 최종 평가로는 도의에 따르는 사람입니다만, 지엽적인 내용에서는 가장 배신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이건 횟수를 세면 될 일이고, 학자들이 이미 횟수를 세었으니 굳이 논하지 않겠습니다). 도의적인 사람을 굳이 꼽는다면 북방의 원소나 유우 정도이겠죠. 《삼국지연의》에서 원소를 깔아뭉개 놓아서 “설마 그럴리가?”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대에는 원소만큼 예학에 따라 행동한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소도 여포를 이용하고는 죽이려 들죠. 여기에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난세”이며, “난세지도”는 “병가지도”라는 점이죠. “병사(兵事)는 궤도(詭道)야.”라고 했습니다. “병가(군대)의 일은 곧 적을 속임이다.”라는 뜻이죠. 궤도라는 말에는 당연히 배신도 포함됩니다. 유비는 난세지도를 잘 따른 인물이지 도의에 따라 행동한 인물이 아닙니다. 다만 유우처럼 “인덕”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한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황제에 오를 때에도 대의명분을 들먹이지만, 《삼국지》에서는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ㅡㅡ; 또한 여포가 자기 마누라를 시켜 유비에게 술을 따르게 하자 유비는 무척 언짢아 하죠. 여포가 유비를 아우라 부르니, 형수에게 술을 받은 셈이므로, 한족인 유비로서는 몹시 큰 모욕을 당했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손상향이 오나라로 돌아가자, 부인을 다시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게 형수(또는 제수)뻘 되는 여자이죠. ㅡㅡ; 형수뻘 여자에게 술을 받으면 안 되고, 아내로 삼으면 괜찮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합니다.
  5. 촉과 오는 강한 나라?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두 나라 국력을 합쳐도 위나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 번 싸우고 만다면 국력이 절대 열세라도 괜찮습니다. 관도 대전이나 적벽 대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죠. 조조는 원소보다 인재도 부족하고, 군대도 부족하고, 군량도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이겼죠. 적벽대전에서도 손권-유비 연합군은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다만 수전이라는 이점이 있었죠. 아무튼 두 전투 모두 열세인 쪽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국가간 전투는 다릅니다. 장기적 안목이 필요해지죠. 그래서 약국은 몸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 《삼국지연의》만 알고 《삼국지》를 모릅니다. 혹자는 《삼국지연의》만 믿고 관구검이 겨우 수천으로 고구려를 정벌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ㅡㅡ; 실제로는(《삼국지》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10배에 해당하는 병력을 보내고도 실패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단 1회의 공격조차 막지 못한 오나라와 촉나라는 그다지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뜻도 됩니다.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은 오나 촉한이 아니라 북방 민족이거나 고구려였습니다.

--Knight2000 2007년 9월 22일 (토) 13:03 (KST)답변

사실에 바탕하고 있다면서 사실을 왜곡하는 면이 있어서 적습니다.
  1. 삼국 정립은 조위, 촉한, 동오가 각각 나라를 일굴 수 있는 형세를 이룬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확정한 계기는 단연 적벽 전투입니다. 헬레니즘 제국의 분열상이 완전히 정립된 것은 켈트족의 침입 후 카산드로스 왕조가 붕괴한 것이지만, 그 전에 이미 분열이 확정되었을 때를 헬레니즘 제국의 분열로 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적벽 전투 이후의 여러 싸움들은 삼국의 경계를 확립하는 것일 뿐 삼국의 형세를 뒤바꾸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도겸의 세력 범위에 대한 것은 대체 근거가 뭡니까.
  2. 관도 대전보다 적벽 대전에서 조조가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았습니다. 적벽 대전에서 조조가 부린 병사는 어림잡아 20만에서 25만 전후로 셈하는데, 관도 전투에서 조조가 그만큼의 병력을 부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3. 이건 사실 자체가 없는 순수 오리지널 리서치이므로 따로 적을 것도 없습니다.
  4. 여포가 한족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것은 오리지널 리서치입니다.
  5. 아무리 동오와 촉한이 약하다고는 해도 두 나라의 인구를 합치면 260만 + 106만, 약 370만으로 조위의 440만의 절반은 훌쩍 넘습니다. 그리고 삼국 시대는 중국 북방과 서방의 세력이 진 이래로 전무후무 허약하기 짝이 없던 시절입니다. 서융과 촉한을 상대한 곽회와 선비를 상대한 견초, 전예를 진수는 같은 전에 묶고서도 견초와 전예는 작은 지방관에 불과해 자기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조위의 주요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두 적'이라고 일컫는 동오와 촉한이었습니다. 그리고 촉한은 조위의 침략을 두 번 막았고 동오는 조위의 거듭된 침공은 다 막았습니다. 서진 때 망했죠. 삼국지와 삼국사기에서는 관구검 군 1만이 동천왕 군 2만을 격파했다고 나옵니다(이런 게 삼국지연의에 나올 것 같기나 합니까).--Synparaorthodox (토론) 2013년 1월 3일 (목) 03:11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