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 (문신)
이의(李顗, 생몰년 미상)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자연(李子淵)의 넷째 아들이고 문종의 처남이다. 자신의 본관인 인천(仁川)의 시조인 이허겸의 증손자이고 자매가 인예왕후니 순종, 선종, 숙종의 외삼촌이고 이자겸의 백부였다.
생애[편집]
이의는 이자연과 김인위의 딸,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 경주 김씨의 넷째 아들이다. 이의의 초기 생애는 군기주부(軍器注簿)에 문종이 1040-50년대에 제수(除授) 할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다.[1]
춘주도감창사[편집]
1068년(문종 22년)에 이의는 춘주도감창사(春州道監倉使)로 임명되어 북산면 청평리에 폐사(廢寺)된 청평사(淸平寺)를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2] 나중에는 장남인 이자현이 여기에서 생을 마칠때까지 살았다.[3] 1080년(문종 34년)에는 병마부사(兵馬副使) 관직이 주어져서 춘천도를 떠났다.
여진의 침입[편집]
1080년 말(문종 34년)에는 동번(東蕃)이 고려를 침입하여 병마부사(兵馬副使) 관직이 주어져서 문정(文正), 최석(崔奭), 염한(廉漢)과 함께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주에서 승을 거뒀다. 동번들의 난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우니 문종이 50냥이 되는 은합을 하사하고[4]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승급을 하였다.[5]
생애 후반[편집]
생애 후반에는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임명되고[6] 그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7] 이의는 1082년 말 이후 고려사 기록들에 나타나지 않으니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