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이화역사관/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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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편집]

쓰개치마를 쓰고 등교중인 1900년대의 이화학당 여학생

이화여자대학교는 한국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미국 감리교 해외여성선교부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 선생이 자택에서 한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정동에 200평 규모의 한옥 교사를 신축했다. 이듬해인 1887년에는 고종 황제로 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공인된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게 됐다. 차츰 학제를 정비해 나가던 이화학당은 1904년 중등과,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립하여 초등, 중등, 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대학과를 설치하여 여성고등교육의 최고 전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기 까지 총 2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졸업 후 교육계와 여성사회단체 및 기독교계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했다.

1925년에 설립된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종래 이화학당 대학과의 교양중심 교육에서 탈피해 전공학과를 두고 문학과 음악, 가사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더불어 새로운 대학캠퍼스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35년 이화여전은 정동에서 신촌으로 교사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신촌캠퍼스 시대를 열었다. 5만여평에 달하는 신촌 부지에 웅장한 화강암 건물들이 들어섰고, 이를 위해 당시 교장이었던 앨리스 R. 아펜젤러 선생은 국내외에 기금마련을 위한 1만여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신촌캠퍼스 시대의 개막은 단순한 공간확장의 의미를 뛰어넘어 종합대학교로 향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이 되자 일제의 교육탄압은 거세졌고 미일관계의 악화로 선교사 선생님들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던 지원금마저 끊기게 되면서 이화여전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이에 1943년 순수 민족자본을 바탕으로 '재단법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어 교육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1943년 12월, 이화여전은 기존의 모든 정규대학업무를 중단하고 1년제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라는 단일과정으로 통폐합되었으며, 1945년 1월에는 이화라는 이름이 민족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하여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변경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민족의 해방과 함께 이화는 본래의 이름인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되찾게 되었으며, 얼마 후 다시 이화여자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종합대학교로의 개교를 서둘렀던 이화는 1945년 10월 이화여자대학교의 간판을 내걸고 3개 단과대학(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9개 학과(문과, 가사과, 음악과, 교육과, 보육과, 체육과, 미술과, 의학과, 약학과)를 개설하여 종합대학교로 개강했다. 그리고 1946년 8월 15일 당국으로부터 종합대학교 제1호 인가서를 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