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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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희한(裵喜漢, 1907년 6월 19일 - 1997년 11월 5일)은 한옥을 짓던 대목장(大木匠)이다.[1] 돈암장을 지었다.[2]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1]

생애[편집]

1907년 6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09년 생으로 올렸다고 한다. 집안 형편은 여유로웠으나 목수일이 좋아 17세이던 1923년 선린상고를 중도에 그만두고 일본인목수 오다 밑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하였다.[3] 학업을 그만 두기 전인 1921년 이미 조선총독부 철도국 목수로서 일을 시작했다. 18살 때 대조전 해체 현장에서 궁궐 대목수였던 최원식으로부터 전통 목수 수업을 받았다.[1] 이후 삼청동민영휘 집 사랑채를 짓는 등 고관대작들의 집을 많이 지었다.[3] 1939년 31살 때 내시였던 송성진의 집인 돈암장을 지었다.[4]

해방 후인 1959년 경복궁하향정향원정을 수리했고 이후 많은 사찰 건물들을 지었다.[3] 1980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목공특별연장전》을 통해 전통 목공 장인으로 인정받았고 1982년 무형문화재 기능모유인이 되었다. 1997년 11월 5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1]

배희한은 그의 스승이나 선배 대목장과 달리 투전도 하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지만 그리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스스로는 "죽은 나무 깍아 먹고 사는 사람에게 원래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였다.[5]:182

작품[편집]

배희한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령목수였던 최원식의 문하였기 때문에 흔히 "마지막 조선 목수"라고 부른다.[6] 화가 김병종은 배희한의 건축에 대해 소박하지만 단단하고 빈틈없다고 평가한다.[5]:177 그가 지은 한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1]

  • 1927년 김익배 형제 가옥
  • 1935년 김재은 가옥
  • 1936년 노유성 별장
  • 1939년 돈암장(송성진 가옥)
  • 1940년 최기태 가옥
  • 1942년 최창학 가옥
  • 1966년 경기도 과천 염불암
  • 1967년 서울 성북동 오래사
  • 1969년 봉천동 구암사
  • 1974년 해군사관학교 호국사
  • 1976년 서세옥 가옥

제자[편집]

제자로 1997년 대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고택영이 있다.[7]

각주[편집]

  1. 배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정성희. “1930년대 한국 주택 정원의 변화 양상 분석”. 《조경학 석사학위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3. 명인명장 <23> 대목장 배희한옹[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매일경제, 1982년 6월 12일
  4. 조용헌. “[조용헌 살롱] 장급(莊級)저택의 주인들”. 조선일보. 2020년 4월 9일에 확인함. 
  5. 김병종, 《김병종의 화첩기행》, 효형출판, 2005년, ISBN 978-89-5872-008-9
  6. 한마당-이흥우 - 경복궁 하향정, 국민일보, 2013년 11월 25일
  7. 대목장 고택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문화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