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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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1971년~2009년 4월 30일)는 운수노조 화물연대 광주1지회 지회장으로 일하다 자살하였다. 그의 시신은 2009년 5월 3일 대한통운 대전물류센터 앞 야산에서 나무에 목이 매어진 채 발견됐다. 박종태의 시신 주변에는 ‘노조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1] 박종태는 유서에서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을 호소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고 밝혔다.[2] ‘운송료 30원 인상’이라는 구두 합의 이행을 촉구하다 계약 해지된 택배 기사들을 도우려 집회를 주도하던 그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도피하던 중에 자살하였다.[3]

사후의 일들[편집]

5월 13일 대전중앙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추미애 국회의원이 방문하여 유가족을 위로하고 특수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입법활동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4] 화물연대는 이후 추모대회를 개최하였고 파업을 결의하였다. 광주 민주노총은 박종태씨 유족 돕기 모금 운동을 시작하였다. [5]

6월 3일 대전지역 시민 단체와 종교계, 학계 관계자들이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 박종태 씨의 자살로 불거진 대한통운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6]

6월 11일 화물연대는 0시를 기해 파업에 돌입했다. 10일 화물연대와 대한통운은 교섭주체 문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합의에 이르렀으나, 대한통운이 합의서 전문과 서명 날인에 ‘화물연대’를 표기하는 문제를 두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막판 교섭은 결렬됐다.[7]

6월 15일 결국 대한통운의 요구대로 ‘화물연대’ 대신 ‘대한통운 광주지사 택배분회 분회장’ 명의로 합의서에 서명하여 3월 16일 해고(계약해지)된 대한통운 광주지사 소속 택배노동자 38명은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제2지회장의 장례식을 치른 후 업무에 복귀하게 됐다. 대한통운 광주지사는 복귀자에 대한 처우 불이익 등 차별을 하지 않기로 했으며 양측은 민형사상 고소, 고발, 가처분 신청 등 소송을 3일 이내에 취하하기로 했다.[8][9]

6월 20일 숨진 지 52일 만에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마당에서 전국노동자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광주 망월동 구 묘역에 안장되었다.[10]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