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엽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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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엽(朴炳燁, 1922년~1998년 9월 13일)은 전남 강진 출생의 북한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으로, 1980년대 초 제3국에서 검거되어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해방 직후부터의 북한 정권 초기 역사에 대해 많은 증언과 저서를 남겼다. 한국에서는 서용규(徐容奎), 신경완(申敬完), 신평길 등의 가명 또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본명은 사후에 공개되었다.

약력[편집]

그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1]

  • 1922년 전남 강진 출생
  • 1930년대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로 이주.
  • 1945년 북조선공산청년동맹 가입
  • 1946년 북조선공산당 입당
  • 1949년 조선노동당 사회부 지도원
  • 1953년 조선노동당 대남연락부 지도원
  • 1960년대 중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부장
  • 1970년대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
  • 1980년대 초반 제3국에서 피검
  • 1998년 9월 13일 사망

한국에서는 필명으로 서용규(徐容奎)[2], 신경완(申敬完), 신평길 등을 사용했고, 본명 박병엽은 그의 사후에 비로소 공개되었다.

주요 저서[편집]

박병엽 증언의 정확성에 대해[편집]

그는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진술은 대체로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가 당시 북한의 문헌이나, 자신이 기록한 일기 같은 것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므로 노년의 기억에만 의존한 진술이 100% 정확한 지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있는 사례도 발견된다.

  • 그는 현준혁의 피살 일자를 1945년 9월 28일이라고 했는데,[7] 실제로는 9월초이며 9월 3일 또는 4일이라는 기록이 가장 믿을만하다.[8]
  • 그는 해방 직후 김일성박헌영의 2차 회동 일자에 대해 박헌영이 1945년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고 증언했다.[9][10] 그러나 이 기간에 박헌영은 서울에 있은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다수 있으므로 방북했다고 보기 어렵다.[11] 또 박헌영이 1945년 말 또는 1946년 초에 방북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많으나 기간은 증언자마다 제각각이어서 특정하기 어렵다. 이 일에 관해서는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시나(쿨리코바)의 증언도 있고[12],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朴吉用, 1920 ~1997)과 소련 군정 핵심 인사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의 증언도 있지만, 박헌영이 방북했다는 시기는 제각각이다.[13]

각주[편집]

  1. 《CEO of DPRK 김정일 (휴먼다큐멘터리 시리즈2)》 정창현 (중앙북스, 2007.10.01) 저자소개 : 신경완
  2. 秘錄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특별취재반 저 (서울 : 中央日報社, 1992)에는 가명 서용규로 그의 증언이 나옴.
  3. 《(현대사실록)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이태호 著; 신경완(申敬完) 증언 (다섯수레, 1991)
  4. 《김정일과 대남공작》: 신평길 저 (북한연구소, 1997.03.03)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 :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선인출판사, 2010.09.01)
  6.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선인출판사, 2010.11.10.)
  7.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2 중앙일보 1991.10.03 종합 9면
    ◎고당과 함께 가다 암살당한 현준혁/적위대복장 청년이 총격/대낮 평양시내서 타고가던 트럭 습격/“민족계열과 친하다” 소 군정에 밉보여
  8. 孫世一의 비교 評傳 (7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平壤市民衆大會에 나타난 ‘金日成 장군’ 월간조선 2010년 8월호
  9.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pp. 27~34, 제1장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10.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11. 1946년 1월 1일에 박헌영은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과 만났다 :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미군정청 문서)
  12. 박헌영의 정치노선: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
    박헌영의 정치노선: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 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
  13.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0> 신탁통치 소용돌이(1)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 중앙일보 1991.11.21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1> 신탁통치 소용돌이(2) 소 군정, 반탁 고수 조만식에 온갖회유·협박 중앙일보 1991.11.28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2> 신탁통치 소용돌이(3)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 중앙일보 1991.12.05 종합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