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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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마리의 말이 새겨진 오마패

마패(馬牌)는 조선 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이 역마를 이용하기 위해 지급 받았던 패이다.[1] 구리로 만든 지름 10 cm 정도의 둥근 패에 뒷면에는 말이 1 마리에서 10 마리까지 그려져 있고 앞면에는 발행처와 발행일이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나무나 철을 이용하여 만들었지만 쉽게 훼손되어 구리로 제작하게 되었다.[2]

배경[편집]

관리의 출장이나 공문서의 전달을 위한 역참 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전국적인 역참 제도가 갖추어졌으며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으며 부분적으로 재정비하였다.[3] 역참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다. 기본적인 숙식과 함께 타고 다니는 말을 지급하거나 교환하여 주었다. 긴급한 일에 대해서는 파발을 운용하여 신속한 연락이 가능하도록 하였다.[4]

관리는 마패를 제시하여 역참에서 말의 지급과 교환을 요구할 수 있었다.[1]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는 역참에서 지급받을 수 있는 말의 수를 뜻했지만 많은 수가 그려져 있더라도 실제 지급 받은 말의 수는 2-3 마리였기 때문에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는 신분의 상징으로 쓰였다.[2]

운용[편집]

조선 초기에는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이 마패를 발급하였으나 이후 병조 등에서도 발급하였고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상서원이 마패의 발급처가 되었다.[2] 초기에는 나무로 만든 마패를 사용하였으나 1434년(세종 16년) 이후 철로 만들었고 《경국대전》 반포 무렵엔 동으로 만들어 상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마패의 한 면에 관원의 등급에 따라 말의 수효를 새겼고 다른 면에는 발행일과 발행기관인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글자를 새겼다.[5] 이에 따라 마패는 관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 암행어사의 상징이 되었다.[2]

마패를 훼손한 자는 장(杖) 80, 도(徒) 2년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6] 1730년(영조 6년) 당시 전국에서 사용된 마패는 모두 670여 개였다.[6]

문화[편집]

암행어사는 지방관의 업무를 감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마패를 직인 대용으로 사용하였다.[1] 이러한 영향으로 민간에서는 마패를 부귀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고[1] 민간에서 부적과 같은 상징물로 만든 가짜 마패들이 등장하였다. 오늘날 민간에서 전해져 발견되는 마패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가짜 마패들이다.[7]

각주[편집]

  1. 마패, 실록위키
  2. 마패, 국립중앙박물관
  3. 역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 교과서 용어해설, 우리역사넷
  5. 역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마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사람들은 왜 마패에 관심 갖나, 평택시민신문, 2015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