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대성(同大城)은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이 백제의 7성을 공취한 성곽의 하나이다.

백제 7성 동대석 표지석 전면
백제 7성 동대성 표지석 수립
동대성 망대
백제 동대성 석축 일부


위치[편집]

전적사료[편집]

  • 신라 선덕왕 13년(644) 9월 왕명으로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대성(同大城) 등 7성을 쳐서 크게 승리하고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1]

발견 및 규모[편집]

  • 동대성(同大城)[2]은 미상으로 분류되었으나 동대성으로 정립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다.
  • 1995년 10월 16일 류금열, 김성호, 윤수경 금수산 성곽탐사 류금열 최초 발견, 2000년 4월 3일 김성호와 류금열이 실측하였다.
  • 금수산의 정상부에서 남측으로 능선에 소재한 성적(城蹟)은 약 1,650m, 용추폭포(龍湫瀑布)의 협곡에서 성안을 형성한 포곡식산성으로 자연성벽의 온둘레는 약 5km이다.[3]

비정 및 유물[편집]

  • 금수산 산성 입구에 하천리 동산곡(同山谷)의 음운은 동대성(同大城)의 비정에 단서제공하며, 상천리 가은산에 가혜성과 청풍문화재단지에 성열성의 연접성이 있다.
  • 성곽의 전망권은 청풍호반관방유적을 아우르는 동(同)자, 대(大)자는 장기간 농성(籠城)하는 수비성과 공격을 겸비한 대성(大城)으로 성안이 넓어서 수천 명이 함께 대거 주둔하여 함께 크게 대승한 동대성(同大城)의 뜻을 함축한다.
  • 동문주변에 차단성을 축조하고, 동문안의 협곡에는 백운사지, 화전민이 거처한 곳으로 식수와 군전이 풍족한 천혜의 대성(大城)으로 수만 명이 함께 주둔할 수 있어 동대성(同大城)에 부합한다.
  • 용추폭포에서 북서향으로 암반을 타고 오르면서 골짜기를 일명 시매골(屍埋谷)은 시체를 묻은 지명이 전승한다.
  • 수산면 상천리 김용빈은 성터에서 무쇠화살촉(길이60cm 폭1cm)을 수습하여 농기구를 사용, 동문안 차단성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을 수습하였다.[4]

각주[편집]

  1. 삼국사기
  2. 삼국사기
  3. 《청풍 성열현인 악성 우륵의 사료집성》(2013)
  4.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