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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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채(金若采)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정(金鼎)의 장남이자 김국광(金國光)·김겸광(金謙光)의 증조이다.
생애[편집]
1371년(공민왕 20) 동진사(同進士) 8위로 문과에 급제했다.[1]
1388년(우왕 14) 1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서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했는데, 염흥방(廉興邦)이 조반을 거짓으로 자복하게 하려고 혹독하게 고문했다. 이때 홀로 불가하다고 주장해 고문을 중지시켰다.[2]
6월 지신사(知申事)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달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후 사헌부(司憲府)에 의해 논죄되어 먼 고을로 유배되었다.[3]
이후 조선조에서 벼슬했으며, 1400년(정종 2) 4월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서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과 함께 훈친(勳親)의 사병 혁파와 병권의 중앙 집중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려 시행시켰다.[4]
12월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파직되었으며[4][5], 1404년(태종 4)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나갔다.[5]
사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6]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김진(金稹, 1292년 ~ ?)[6] : 정당문학(政堂文學), 장영공(章榮公)
- 조부 - 김영리(金英利, 1314년 ~ ?)[6] :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