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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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서화 감상〉

감상(鑑賞)은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해하고 즐기는 일련의 과정이다. 작품을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발견한 결과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감상이 완성되므로, 감상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의의[편집]

감상은 단순한 관조, 즉 보는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관조는 넓고 좁은 갖가지 의미의 뜻을 지니는데 '예술은 관조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경우의 관조와, '관조야말로 예술의 창작이다'라고 할 경우로 관조의 뜻은 변한다. 전자의 경우는 지극히 상식적인 견해, 즉 직관(直觀)하는 것과 멀지 않은 뜻으로 풀이되지만 이러한 관조는 감상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좀더 예술의 진의(眞義)에 가깝다. 물론 예술은 인간의 창조활동의 결과 생겨나온다. 그러나 그 만들어진 작품 그대로는 단순히 자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칠해진 그림물감의 집적(集積)이요, 브론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관조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이 경우는 감성적·내적인 관조다. 감성적 관조에 의하여 작품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내적 관조에 의하여 작품은 예술로서 관조자의 심중에 창조된다. 단순한 물질로서의 작품은 여기에 예술로서의 혼(魂)이 취입된다. 이런 뜻에서 관조는 제2의 창작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관조는 제3자에 의하여 이룩될 뿐만 아니라 작자 자신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뜻에서의 관조는 감상(鑑賞)과 거의 마찬가지의 뜻이 된다. 다만 감상의 경우는 거기에 평가의 의미가 농후하게 합쳐져서 가치인식(價値認識)이라는 심적 작용이 수반하게 된다. 다음으로 완상(玩賞)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과 감상과의 차이점을 잠깐 살펴보자. 완상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서 감상의 동의어로 쓰일 경우도 있고 다소 다른 뜻으로 쓰일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미적인 수용, 미적인 향수 등 수동적인 미적 태도라고 풀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뜻에서는 감상의 소극적인 동의어로서 가끔 감상(感賞)이란 말이 쓰이는 경우가 있으며, 미해(味解)란 말을 쓰는 일도 있는데 다소의 입장의 상위나 관점의 상위에 의하여 이러한 말이 쓰여지고 있다.

개념[편집]

미의식의 구상적 내지 직접적인 인식작용을 표시하는 개념이다. 이상주의의 미학적 입장에서는 오성(悟性)의 직접적인 작용으로서의 지적 직관(知的直觀)과 같은 개념이다. 오늘날의 경험심리학적 미학에서는 직관을 심적 활동 또는 과정으로서 보기 때문에 관조는 직접적인 지각으로서 지각되고 있다. 그러나 미의식의 견지에서 보면 창조 활동 또는 상상작용에도 응용되어 상상관조(想像觀照)라 한다. 특히 미의식의 지적 활동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과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는 데에 그 특색을 지닌다고 본다. 이 때문에 '감정에 넘치는 직관'이란 개념이 생긴다. 이것은 규범적 미학으로서 주로 심리학적 연구 위에 서서 감정이입의 원리를 취했다. 예술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들의 지각 또는 상상 위에서 예술이 전체적으로, 또 통일적으로 파악됨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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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감상은 감상물이 지니고 있는 미를 맛보고자 함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감상물은 한없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를 감상물로 택하지 않으면 노방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감상자가 어떤 계기가 주어져 감상물과의 마음의 균형이 생겨야만 비로소 '감상'이 성립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교사와 학생과의 예를 든다면 아무리 교사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나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감상물에 대해서 흥미를 갖도록 해야 거기에 감상 교육의 의의가 생겨난다. 2세된 유아조차도 기차나 자동차에는 흥미가 쏠려 밖으로 나가 그것을 보고 싶다고 보챈다. 우리는 여기서 감상의 싹을 엿볼 수 있다. 감상에는 감상물에 대하여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우수한 감수성과, 청결하고 예리한 감각의 육성에 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으나 거기에 지각이나 지성이 결합되어 발달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감상활동을 통해서 지각이나 지성에 반응을 보이는 경지까지 심화시키고, 자주적인 판단에 의하여 새로운 감상물과 마주 서도록 하면 틀림없이 감상활동은 명확한 인식 위에 서게 되지만, 이렇게 되면 된 대로 또 역시 거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지적인 판단에 젖은 나머지 신선한 경이나 감동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을 잊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쪽의 배려가 고려되어야 비로소 감상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는 것이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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