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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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이전[편집]

1872년[편집]

<창가 독본>이 보급되면서 '창가'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1885년[편집]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한 <찬미가>(찬송가)가 보급되었다.

1896년[편집]

스코틀랜드 민요 의 멜로디에 윤치호가 가사를 붙인 <애국가>가 소개되었다.

1925년[편집]

<희망가> 발표되었다.

1926년[편집]

윤심덕이 <사의 찬미> 발표 후 투신자살하였다.

1930년[편집]

<타향살이>, <황성옛터>, <눈물 젖은 두만강>,<나그네 설움> 등이 유행하였다.

1945년[편집]

<4대문을 열어라>가 해방가요 1호로 기록되었다.

1946년[편집]

<귀국선>, <고향만리>, <신라의 달밤> 등이 유행하였다.

1950년대[편집]

1950년[편집]

<전선야곡>, <전우야 잘 있거라>,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유행하였다.

1951년[편집]

<슈샤인 보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유행하였다.

1953년[편집]

<아메리카 차이나 타운>, <애리조나 카우보이>,<페르시아 왕자> 등이 유행하였다.

1958년[편집]

김 시스터즈가

미국 시장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대[편집]

1962년[편집]

미8군 무대 출신인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가 유행하였으며, 최희준, 박형준, 유주용, 위키 리 등 학사가수가 등장하였다.

1963년[편집]

이미자가 <동백 아가씨>를 발표하여 가요사상 최초로 1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다.

1964년[편집]

애드 훠, 키 보이스의 등장으로 그룹사운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편집]

남진, 나훈아 라이벌 시대로 트롯이 강세를 보였다.

1968년[편집]

한대수의 귀국무대로 포크시대를 예고하였다.

1970년대[편집]

1970년[편집]

정훈희가 도쿄가요제어서 <안개>로 3위에 입상하였으며, 은희의 <꽃반지 끼고>, 라나에 로스포의 <사랑해>로 포크시대가 열렸다.

1971년[편집]

김민기가 <아침이슬>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였다.

1972년[편집]

고고 클럽의 유행으로 록 그룹이 득세하였다.

1976년[편집]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여 가요사상 최초로 100만장을 기록하였으나 대마초 사건으로 관련자들의 연예활동이 규제되었다. 이것으로 조용필은 음악활동에 큰 타격을 받았다.

1977년[편집]

대학가요제가 개최되어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가 대상을 받았다.

1978년[편집]

해변가요제가 개최되어 블랙 테트라의 <구름과 나>가 1위, 활주로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가 2위에

입상하였다. 사랑과 평화, 산울림, 작은거인의 활약으로 록 그룹이 강세를 보였다.

1980년대[편집]

1980년[편집]

국풍가요제에서 이용의 <바람이려오>가 대상을 받았다.

1981년[편집]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로 트롯붐이 일기 시작했다.

1982년[편집]

트롯메들리(일명:뽕짝 메들리) 선풍이 일어났다.

1985년[편집]

MBC에서 트롯을 '애가'로 명명하다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1986년[편집]

들국화의 등장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광조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후 발라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86년[편집]

시나위의 등장으로 헤비메탈의 장이 열렸다.

1987년[편집]

박남정, 김완선, 나미 등 댄스뮤직 가수가 각광을 받았다.

1988년[편집]

봄여름가을겨울이 앨범 발표와 함께 휴전재즈 붐을 선도하였으며,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가 88 서울 올림픽 공식가요로 지정되었다.

1990년대 이후[편집]

1992년[편집]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랩 선풍이 일어났다.

1994년[편집]

레게 선풍과 함께 김건모의 <핑계>가 사상 초유의 250만장이 팔렸다.

1995년[편집]

R.ef의 레이브, 박미경의 정글, 듀스의 힙합, 솔리드의 R&B가 유행하였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으로 갱스타 랩을 시도하였다.

1996년[편집]

맘보, 삼바, 차차차, 탱고 등 라틴 리듬과 로커 빌리, 펑크록 등 복고음악이 유행하였다.

1997년[편집]

H.O.T, 잭스키스, 핑클 등의 신세대 댄스 스타들이 각광을 받았다.

1998년[편집]

일본으로 건너가 크게 활약하였던 S.E.S가 귀국하여 국내 청소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9년[편집]

여가수와 언더 밴드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2001년[편집]

김건모가 데뷔 10년 만에 음반판매량 1,000만 장을 돌파했다.

2002년[편집]

윤도현밴드, 부활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록뮤직이 눈길을 끌었다.

2003년[편집]

비, 세븐 등 남성가수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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