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소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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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Song Modi.jpg|섬네일|남송 회종]]
'''남송 회종 조병'''(南宋 少帝 {{zh|t=趙昺|s=赵昺|p=Zhao Bǐng}}, [[1272년]] 2월 12일 ~ [[1279년]] 3월 19일)은 [[남송]]의 제 9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 [[1278년]] 5월 10일 ~ [[1279년]] 3월 19일)이다. [[묘호]]는 회종(懷宗) [[시호]]는 부여받지 못하여 즉위 이전의 작위를 따서 '''위왕'''(衛王), 연호를 따서 '''상흥제'''(祥興帝), 휘를 따서 '''제병'''(帝昺), 어린 황제라는 뜻으로 '''소제'''(少帝)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된다. 본문에서는 능의 이름인 소제릉(少帝陵, [[:zh:宋少帝陵|zh]])을 따라 소제로 통일한다.

== 생애 ==
[[1272년]], [[남송 도종|도종]]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수용(修容) 유씨(兪氏)이다.

[[1274년]], 형인 [[남송 공종|공종]]에 의해 신왕(信王), 이어 다시 광왕(廣王)에 봉해졌다.

[[1276년]], 수도인 [[항저우|임안]]이 [[원나라]]군에게 함락되고 형 공종이 항복하자 국구 양량절(楊亮節)과 대신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 진의중(陳宜中), [[문천상]](文天祥) 등<ref>육수부, 장세걸, 문천상을 삼걸(三傑) 또는 삼위충신(三位忠臣)이라고도 한다</ref>은 단종과 소제를 데리고 [[저장 성]] [[진화 시]]로 도피하여 단종을 옹립한다. 이 때 소제는 단종에 의해 위왕(衛王)에 봉해졌다.

[[1278년]], 단종이 병으로 죽자 육수부, 장세걸 등<ref>문천상은 원의 포로가 되었고 진의중은 타이(시암)로 망명하였다</ref>에 의해 옹립되어 [[홍콩]]의 [[란터우 섬]]에서 [[연호]]를 상흥(祥興)으로 하고 즉위했다.

당시 원나라군은 [[바얀]]이 1276년에 군사 요충지인 [[푸젠 성]] [[취안저우 시]]의 호족인 [[포수경]]을 포섭, 그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남송군에 대해 유리하게 싸울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3월 19일]], 중국 남부 광주(廣州)의 애산(오늘날의 [[광둥 성]] [[장먼 시]])에서 원나라와 남송의 최후 결전이 있었다. 이 전투가 임안의 함락과 공종의 항복으로 사실상 멸망한 남송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 [[애산 전투]]로 전투의 와중에도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대학]]을 가르쳤다. 전투 후 패배 및 멸망에 절망한 남송의 신하 및 간부들이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 소제도 육수부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남송]]이 멸망할 때 나라에 순사한 충신은 다른 왕조에 비해 대단히 많았으나, [[원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송나라의 유민으로써 살아 남기를 계속한 사대부도 있어 문장궤범을 편찬한 [[사방득]](謝枋得),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曾先之),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의 주석서)을 저술한 [[호삼성]](胡三省) 등, 문학 사학에서 이름을 남긴 송나라의 유민도 많았다.

== 각주 ==
<references/>

{{송나라의 역대 황제}}

{{기본정렬:회종, 북송}}

[[분류:1272년 태어남]]
[[분류:1279년 죽음]]
[[분류:남송의 황제]]
[[분류:자살한 사람]]
[[분류:쿠빌라이 칸]]

2016년 6월 24일 (금) 14:17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