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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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댓글: 2000sanai님 (12년 전)

이일 장군은 혼란했던 시기, 40여 년 간 외적과 싸워 온 조선의 장수입니다.

이일(李鎰)

1538년(중종 33)∼1601년(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경성판관 등을 거쳐 1583년(선조 16) 전라좌수사·경원부사를 지냈다. 1587년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이탕캐(尼湯介)의 난을 평정하고, 녹둔도(鹿屯島)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인 1588년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소탕하여 가옥 200여동(棟)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1589년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申砬)·정언신(鄭彦信) 등과 변방의 군비상황을 의논하였다.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사잇길로 도망하여 황해·평안도로 피하였다. 이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王城灘戰鬪)에서 왜적 80여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가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하여 이를 용서하였다. 그뒤 지중추부사·비변사당상·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유지에 힘썼고,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眞)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그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增補制勝方略)》이 있다.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비록 몇번 패퇴한 적도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많은 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문서 내용이 이일 장군의 생애에 대해 지나치게 나쁜 면만 기록되어 있는 것 같네요. 이탕개의 난 당시에도 이일은 도망치고 이순신만 남아 의롭게 싸운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여진족이 쳐들어 올 당시엔 당연히 추수를 감독하던 이순신에게 방비의 책임이 있었고 - '부사 이경록(李慶祿)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이순신과 추수를 감독하였다.'- 이후 실제로 여진족을 소탕한 것은 이일입니다.

"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순찰하던 중 경흥(慶興)에 당도하여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를 보내 4백 기(騎)를 거느리고 얼음을 타고 도강하여 새벽에 추도(楸島)를 엄습하게 해서 배반한 호인(胡人) 33급(級)을 베었다. 이어 길주(吉州) 이북 제진(諸鎭)의 군사 2천여 기(騎)를 출동시켜 회령 부사(會寧府使) 변언수(邊彦琇), 온성 부사(穩城府使) 양대수(楊大樹), 부령 부사(富寧府使) 이지시(李之詩)를 장령(將領)으로 삼아 몰래 군사를 도강시켜 밤에 시전(時錢)의 반호(叛胡)를 엄습, 2백여 집을 불태우고 3백 80급을 베었다. 이는 녹도(鹿島)를 침입한 죄를 성토한 것이다." <선조실록수정본 22권, 21년(1588 무자 / 명 만력(萬曆) 16년) 1월 1일(을유) 3번째기사>

그리고 문서 내용상에서 상주출병 당시 이순신을 모함한 사실때문에 군관들의 평가가 좋지 못하여 부장이 되길 꺼려했다거나, 황해도로 도망치면서 조선 양민을 죽여 그 시체를 왜병으로 위장했다는 내용은 출처는 어디인가요? 과연 유성룡 같은 당대의 충신이 추천하고 - '성룡이, 경상 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재주가 없으므로 노련한 장수인 이일(李鎰)로 교체시키자고 하였으나, 홍여순(洪汝諄)이 명장을 외지로 내보낼 수 없다 하여 저지되었다.' - 선조 또한 이일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 장수라면 대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당시 조선군의 주력이라 할수 있는 중군을 이끌게 했을까요?

"계청(啓請)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았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두서없이 적다보니 본의아니게 이일을 두둔하는 글처럼 되어버렸지만 거듭 말하건데 기재된 글이 지나치게 안 좋은 면만 부각된 것 같아서 다른 내용도 첨부해 보았습니다. 어쨋거나 40여년을 넘게 외적과 싸워온 장군인데 '이일'이란 인물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0sanai (토론) 2011년 8월 26일 (금) 19:57 (KST)2000답변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D%B4%EC%9D%BC

駕洛國(가야) (토론) 2013년 12월 8일 (일) 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