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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유광 (오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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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5년 전 (Synparaorthodox님) - 주제: 오향후

오향후[편집]

노왕 유민도 오향후를 지냈습니다. 퇴위한 해도 유광이 오향후에 봉해진 지 얼마 전입니다. 유민은 노나라의 오향, 유광은 초나라의 오향에 따로따로 봉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추은령에 따르면 왕국은 후국을 거느릴 수 없으므로, 같은 오향에 두 왕자후가 봉해지는 것은 그냥은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유민이 노나라의 오향에 봉해져서 오향나라가 동해군으로 옮겨졌다가, 유민이 노왕이 된 후 오향나라가 오향현이나 오향으로 되고 초나라에 속했다가, 다시 유광이 봉해지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오향나라를 쓰수이 현 남쪽으로 추정하는데 여기가 초나라에 속하면 월경지가 되므로 역시 이상합니다.

왕망이 봉한 왕자후국이 추은령의 제한을 받지 않고 왕자의 본향 왕국에서 떼어주지 않는다고 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되는데, 왕망이 봉한 후국은 초나라에 20국, 동평나라에 24국에다 동평나라의 경우에는 왕손에게 봉하는 등 통상적인 규칙을 잘 따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이걸 입증할 참고문헌이 있을까요.--Synparaorthodox (토론) 2018년 9월 6일 (목) 11:39 (KST)답변

그간 열후들의 봉지의 연혁을 살펴보면서, 이름이 같으면 봉지를 이어받았구나 싶어서 그렇게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자후 쪽으로 넘어오니 사뭇 다른 것이 확인됐습니다. 평곡후(平曲侯)를 예로 들자면 주공유농이, 의춘후(宜春侯)는 위항유성이 공존하게 됩니다. 일단은 공신과 왕자후가 양립하는 꼴이긴 합니다만, 여차하다가는 공신과 공신 사이에서, 또 왕자후와 왕자후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겠다 싶어서 이러한 기술은 자제하고 있습니다(네, 맞습니다. 정말 무식한 방법으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_-;;;). 위기후를 주고받은 주간두영 등, 오초칠국의 난을 기점으로 한 경우는 딱 봐도 확실하지만...
말씀하신 오향후 또한, 그냥 책잡힐 일 하느니 무조건 '첫 봉건'으로 때려박자는 생각에 별 확인도 안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안 그래도, 왕자후들 중 鄕 시리즈의 아이들은 정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관련 연구를 확실히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威光 (토론기여) 2018년 9월 19일 (수) 00:28 (KST)답변
일단 이 건은 왕선겸의 주석이 있긴 하네요(先封魯頃王子閔, 志屬東海). 실제 고증은 차치하고, 일단 주석에 따르겠습니다. 미봉책이긴 합니다만, 앞으로도 유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威光 (토론기여) 2018년 9월 19일 (수) 02:08 (KST)답변
다른 왕자후국인 광척후도 초나라와 노나라 양쪽에 존재하는데, 왕선겸은 노공왕의 아들 광척절후가 먼저 봉해진 후에 초효왕의 아들 광척양후가 봉해졌다고 했지만 주진학은 그럴 리 없다고 했습니다(노군 문서 참조). 노나라의 광척후국과 초나라의 광척후국은 다른 후국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추은령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여주신 왕선겸의 주석도 같은 논리라서 주진학이 똑같이 반박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주진학의 저서 《서한정구지리》에서는 원연·수화지간 이후의 후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습니다만 찝찝하긴 합니다.--Synparaorthodox (토론) 2018년 9월 19일 (수) 10:03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