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흠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전기 문신. 함길도 도관찰사로 부임, 새로 설치된 4진의 수비와 민심안정에 공헌하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경사에 능통하고 천문에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출생-사망 1378 ~ 1439

본관 동래

자 요좌

활동분야 정치


본관 동래(東萊). 자 요좌(堯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지평(持平)에 오르고 1408년(태종 8) 박은(朴訔)을 민무질(閔無疾)의 일파라 하여 탄핵하다 장흥(長興)에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1411년 식년문과에 급제, 이조 ·병조의 정랑 등을 지내고 1416년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좌의정 박은과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 사이에 노비문제로 송사(訟事)가 생기자 다시 박은을 탄핵, 그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430년 대사헌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433년 황보 인(皇甫仁) 등과 《계축진설(癸丑陣說)》을 찬진, 이어 충청 ·전라 ·경상도순무사가 되어 연해주군(沿海州郡)의 성터를 심정(審定)했다. 1435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부임, 새로 설치된 4진(四鎭)의 수비와 민심안정에 공헌하고 1437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천문(天文)에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