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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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빙삼(尹聘三)은 칠원윤씨 29세이며 충효공(윤환, 문하시중)의 후손이다. 부친은 찰방 담(湛)이고 고령김씨사이의 차자로 태어났다. 자(字)

는 여임(汝任)이다.


효자 윤빙삼의 정려각

출 생 : 1601년 2월 1일

사 망 : 1673년 1월 27일

출생지 : 청양군 청남면 지곡리

안 장 : 청남면동강리 외동 장항(獐項) 남남동향(亥坐)

정 문 : 청남면 지곡리 197

해 문 : 향토사학자 윤경수


빙삼의 효성과 우애는 천부적으로 타고나 8살에 어머니상을 만나 울부짖고 가슴 치며 통곡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3년간 항상 묘소 곁에 있으며 온종일 울고 있었다. 계모를 섬기면서도 능히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맛있는 음식 봉양과 조석으로 부지런히 살피며 효도를 하였다.

아버지 병세가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넓적다리살을 베어내 약으로 지어 드렸다. 그 때문에 회생하여 5년 간을 더 연명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버이 병에 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간혹 있지만 이 사람같이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 명을 살린 것은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장례 때에도 슬픔이 간절하였다.

그 후 여막에 살며 죽만 먹고 채소와 장까지 먹지 아니하고 의복도 벗지 아니하였다.

때마침 날씨가 추웠지만 늘상 빈소 곁에 살았기 때문에 병이 되어 마침내 여막에서 죽었다.


군내의 많은 선비들이 모두 소원하는 것을 임금께서 듣고 포상하고 선양하였는데 빙삼이 살아있다면 겸손하여 소문내고자 하는 것을 멀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을 사람들이 억지로 진행하지 못하였다.


여임의 사망후 22년이 지난 1695년에 이르러 순무어사 송광연(송광연, 1638~1695)이 이곳에 순행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 보고하여 1695년 명정을 받았다. 숙종 38년(1712) 장령(掌令)에 증직되었다.


정려각은 앞면과 옆면 1칸이며 맞배지붕이다. 명정 현판 ‘효자 증봉열대부사헌부장령윤빙삼지문’과 행장(行狀)이 걸려있다.

윤빙삼 정려는 2019년 5월 31일 청양군향토유적 2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칠원윤씨 가승. 청양군지. 청양의 효열전.